2008년 07월 04일
촛불집회와 관련한 몇가지 생각 정리.
정리는 되지 않고 있다. 그저 잡상들.
밸리에 올릴까 올리지 말까 생각중이나, 이 글의 경우 밸리에 올리되 합리적인 비판, 비평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시 리플을 차단할 듯 싶다. 비판을 듣고 싶은건 사실이나 굳이 카오스를 만들고 싶진 않다. 어차피 내가 제대로 된 전문가도 아니고, 학생의 입장에서 배우며, 동시에 하나의 모델을 세우고(정확히는 기존의 것을 변형하고) 반증해보려 하는 이상, 모든 의견을 다 듣기보단 하나의 정합적(Congruence)인 모델을 세우고 지켜나가며 수정해보는게 낫지 싶다. 어차피 이 모델의 진위 여부 판단에 목숨이 걸려있는 처지도 아니고, 전문가는 더더욱 아닌지라.
물론 오프라인 지인들은 언제나 그렇듯 리플에 뭘 써도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 올 지인은 세명 내지 네명으로 정해져 있는걸.
1. 명목변수와 실질변수의 관계
나는 s*********님의 분석을 꽤 좋아하고 신뢰하는 편이다. 그분과 내 의견은 일치할 때가 많은데, 한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위대의 진짜 목적에 관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공학적 신뢰"가 충족 된다면 어차피 쇠고기의 안전성은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는 시위대의 모습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시위대의 목적을 암묵적으로 s모 님께서 "쇠고기 안전성"으로 이해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근데 시위대의 실제 구호는 "검역 주권"이고, 이는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분명히 차이를 달리한다고 본다. 즉, 쇠고기 안전성이 실질 변수라면, 검역 주권은 명목 변수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둘의 차이를 명료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About.com의 설명을 빌려보면 "Generally a real variable, such as the real interest rate, is one where the effects of inflation have been factored in. A nominal variable is one where the effects of inflation have not been accounted for." (http://economics.about.com/cs/macrohelp/a/nominal_vs_real.htm)로 되어 있다.
현재의 결과를 보면 정부로서는 할만큼의 추가 협상을 해서 실질적으로 달성하지 않았느냐고 하고 있고, 이는 QSM의 여러 문제점 및 WTO 제소 가능성을 논외로 하고 볼때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애초에 시위대가 원한건 "쇠고기의 안전성"이 아니라 "검역 주권"이고, 언제나 그렇듯 이런 상징물은 "물화"되어 나타날때 큰 효력을 발휘한다고 보는데, 예컨대 태극기가 6월 25일 현충원에서 쓰일경우 "자유한국"의 물화이지만 시위대나 광주에서 쓰일 경우 "해방민중"의 표현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위대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보여지고, 따라서 불안한 시위대는 그들의 요구에 관한 실질 변수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ㅂ모님과 F모님의 인원 추산 논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대리할 실질 변수를 인원수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가 했어야 될 것은 추가 협상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즘에 입각한 통치행위 였으며, 그런 면에서 s*****님(다른 분이다)의 계란이라도 맞고 오라는 지적은 타당했다. 즉, 시위대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물화"된 상징물이지, 쇠고기의 안전성이 아니다. 그들 개개인은 실질적 쇠고기의 안전성을 판단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집단지성(이 용어를 왜 여기서 쓰는지에 대해서는 밑에서 후술할 것이나, 한가지 밝혀둘 것은 난 마케팅 용어를 싫어하기에 쓰다가 나도 모르게 공정성을 벗어난 흔적이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다.)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2. 정부 대응의 문제점
위에서 제기한 시위대의 뜻하는 바가 맞다면, 정부야 말로 이 모든 재앙의 원흉으로 볼 수 있다. 때때로 열의에 넘치는 딜레탕트는 자신이 모든것을 다 할 줄 알고, 자신의 생각이 합리적인 만큼 당연히 설득하면 따라주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한가지 근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어도 딜레탕트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 등의 자원이 부족하며, 설령 자원마저 만족되더라도 그들의 선호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저 멀리로 잠시 넘기기로 하고, 조금 다르게 보면 최근 시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야 말로 최적 정책의 시간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간단하게 한 국면을 분석해 보면, 1일 폭력 진압 이후 10일까지 정부는 비폭력으로 대응 하다가,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 갑자기 시위대에 대한 폭력적 대응으로 맞서는데, 이는 시위대가 1일 이후 시위의 저항 정도 D1으로 설정하고 행동했다가, 그간의 정부의 약한 진압을 통해서 정부에게 시위의 저항 정도 D2 (, D1>D2)를 결정하자 정부의 손실함수의 최적해는 "지키기"에서 "때려잡기"로 변한것이며, 이를 통해 시위대의 저항정도는 D3 (D3>D1)으로 바뀌어 결국 손실함수의 값이 올라가 버린 꼴이 된다.
이런 면에서 정부에게 준칙을 강요하는 자들은 정부의 이런 대응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는데, 다만 이런 관점은 정부의 대응의 변화를 목적식의 시위대 통제 변수의 변화과정으로만 보게되는 분석의 틀의 단점이 있다. 이 경우에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을 통한 분석이 계량적 요소는 조금 떨어져도 훨씬 정합적으로 보여지는데, 특히 벡의 주장 자체가 위와같은 "명목 변수로서의" 위험에 대해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그 분석을 여기에 적용하자니 하자니 기껐해야 한번 읽고 정리도 안해서 생각이 안나니까 패스. 언제 시간나면 읽고 분석에 적용해 봐야겠다.
사실 이 문단에서 하고팠던 말은 시위가 사그라들 수록 그에 불을 지른 것은 정부의 대응이었다고 보는데, 이는 정부가 근본적으로 시위의 문제를 "실질 변수"에 국한 시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잘못 여부 판단은 매우 힘들다고 여겨지는데, 예를 들어 그녀가 매우 기분이 안좋은데 거기다 대고 진정으로 애인의 기분을 걱정해서 "프로작 두알이면 나아질거야"라고 던지는 그녀의 애인의 잘잘못을 평가해보라는 것과 같은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조금 다른의미에서, 남자에게 돌을 던질수 있는지가 그닥 많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실질 변수가 아닌 명목 변수였을 것이다. 나로서는 추가협상 보다는 차라리 국민들 앞에서 어청수를 대동하고 나온다음에 눈물 한번 흘리고 "이 개새*야!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한 뒤 직접 사과하는 퍼포먼스가 효과는 훨씬 좋았으리라 생각된다.
3. 집단 지성 논의와 관련해서
사실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2번에서 던질게 아니라 3번에서 던졌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번에서 던진건 정부의 대응책과 인간에 대한 관점 - 합리적 경제인- 은 빼놓을 수 없는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집단 지성의 논의부터 검토하기로 하자. 난 사실 웹 2.0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케팅 용어이고(이미 상표등록이 되어 있다), 불확실한 통계적 자료에 근거해 있으며, WWW의 창시자 팀 버너스 리가 말했듯 이미 예정된 방향을 새로운 용어로 이름 붙인것일 뿐이라 생각된다. 웹 2.0은 마치 그것이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특징이 아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인 양 호도 한다. (오히려 마셜 맥루한의 관점에서 웹 2.0이 지적하는 여러 특성은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최근의 마케팅적 용어 정의에 의한 집단 지성의 표현은 논의를 각하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집단 지성을 일명 창발성(emergent)와 관련해서 사용할 경우이다. (왜 흔히들 말하는 아프리카인들은 옛날부터 프랙탈 모양으로 집을 지었다거나, 도시의 발전경로는 대개 일정하다거나 등등.) 이경우에는 시위대의 행동을 집단 지성이라 볼 충분한 여지가 있다. 물론 이 경우 창발성은 플래시몹과 관련해서도 충분히 쓰일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의 집단 지성은 일종의 라이프-게임에서 개개의 라이프 들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통계적 양상으로 밖에 볼 수 없는데, 이런 지점에서 집단 지성의 역할은 제한되어 있다. 사람들은 위키피디아를 보고 집단 지성이라고 극찬하는데, 사실 그들의 행위는 "1.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사전의 내용을 비교한다. 2. 있고, 자신의 정보와 동일하다면 다음 정보를 검색한다. 3. 있으나 동일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보가 우월하다면 자신의 정보를 복사하고, 사전의 정보가 우월하다면 사전의 정보를 자신에게 복사한다. 4. 없다면 채워넣는다. 5. 다시 1부터 반복한다." 라는 5개의 프로세스를 가진 라이프 게임의 프로세스로 비유할 수 있으며, 물론 이것이 만들어 내는 심히 창대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뿐이다. 그것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은 블랙박스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인지과학을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부분에 대한 나의 무지를 채워주셨으면 좋겠다. 어쨌든 시위대가 창발적이라고 생각할때, 이들의 프로세스는 대략 "1. 시위에 나가지 않으면 MB의 행적을 보고 분노한다. 2. 시위에 나간다. 3, 이 게임의 참여 여부에 대해 몇몇 요소들에 대한 판단에 의해 동의/비동의의 분기가 이루어지고, 동의는 1부터 반복, 비동의는 게임을 이탈한다" 정도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런 분석은 비록 과도하게 인간에 대해 단순화 하긴 했어도 어느정도 타당한 면이 있고, 이를 집단지성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3.1. 판단 능력의 검토
문제는 이렇게 이루어진 집단 지성이 어떤 판단 능력을 가지는가 이다. 즉,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가"라는 면에서 볼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프로그래밍에서 수만개의 프로세스를 일일히 스파이로 프로세스에 대해 후킹을 하는 것 혹은 서버 내에 연결된 수만개의 컴퓨터에 대해서 동시에 IP spoofing을 시도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즉, 논리적으로 가능하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어떤 판단에 기대한 책임을 갖기 어렵다. 이는 과거의 운동과 대비되는 지점인데, 과거의 상명하복 식의 운동의 경우 머리가 있었으나, 지금의 경우 집단 지성이란 이름 하에 모두가 한 거대 세포를 이루는 단세포의 일부가 되어 버린것과 비슷하며, 이들에 대해서는 셀레늄을 쳐바르던가 하는 류의 처방이 필요한 것이지, 예측이 필요하진 않다. 어차피 당신의 예측은 틀리거나, 맞아봤자 이미 대처하기엔 늦을테니까.
이 경우 기존의 지휘부로 불리던 사람들은 이들 개별 라이프들이 수집하는 몇몇 정보를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대의 민주제하 정당이 일종의 투표거래(logrolling)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효율적인 공급책들은 동시에 이들 개별 라이프들의 행동에 통제를 가할 수 있는 병목(bottleneck)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정보의 유통 속도 결정과 신뢰성 결정을 동시에 해서 시위의 행동을 어느정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것이다. 물론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와, 정보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고리라는 의미에서, 경영학의 생산 및 운영이론의 용어로서 병목이란 용어를 들여온 것이다. 이때, 최근 정부처럼 대책위, 즉 병목을 때려잡게 되면 정보의 신뢰도의 저하로 인해 개별 라이프들은 카이사르 말마따나 "소문의 노예로서,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짓을 하게 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방금 전 문장의 표현은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말한 것이며, 실제로 이 라이프 게임 안에서는 그들이 믿는 모든것은 그들에게 팩트로서 구성되게 된다.)
만약 저 병목들이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 한다면 어느정도 통제 가능성이 있는 집회라고 볼 수 있으나, 병목의 역할이 사라질 때 개별 라이프, 혹은 라이프 집단들은 새로운 병목을 만들게 되며, 그에 따라 집단적 행동이 분산되고, 따라서 각종 시위가 "창궐"하게 된다. (창궐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병목이 있던 경우라면 실질 변수를 명목 변수로 번역해주는 누군가를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처럼 정부가 지휘부를 파괴하는 것으로 대응한다면 시위는 일시에 창궐하다가 곧 사그러질 것이고, 그게 우리가 지켜본 사제단 출현 직전의 상황이다.
이 문단의 결론은 집단 지성에 의한 시위대의 판단은 병목을 통한 정보 흐름에 대한 개별 라이프의 판단으로 정해지기에 어떤 일정한 값을 가지기 어려우나, 역치값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4. 개인의 분화, 혹은 사라짐.
선호 체계만으로 모든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것 같다. 여기는 좀 할이야기가 많으니 패스.
이제는 각론들.
5. 폭력 진압에 관하여
나는 사르트르의 글귀에 아직도 찬동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행정법학의 발전 과정이 특수권력관계를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끌어내리고 동시에 행정부 역시 법 아래에, 정확히는 법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 판단 아래에 구속시키려 하며, 그 공정력의 인정은 법적 안정성의 인정일뿐 법률적합성에 대한 판단은 달리해야된다는 것과, 37조 2항의 비례원칙상 살펴볼때, 구성요건적 효력을 가진 행정 행위를 발급할 수 있는 주체는 그만큼의 의무, 즉 하자없이 공정하게 법률상의 권한을 해석해야 하는 의무가 일반 사인에 비해 더 강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고, 합헌적인 시위를 하고 있는 시위대에게 수인하명을 하기 위해서는 가두 시위 금지의 경우에는 집시법이 해당될 지 몰라도 권력적 사실행위(구타, 살수 등)의 경우에는 고시나 훈령만으로 인정될 수 없고, 경직법 상 개괄적 직무 조항만으로는 그것을 정당화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경찰 소극의 원칙에 충실해서 오히려 청와대 안쪽으로 시위대를 끌어들여서, 즉 동십자각과 경복궁을 막는 것이 아닌 청와대 양 문을 막아 지키는 것이 광화문의 정상적 차량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전경들의 행위에서 경직법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법적 집행이 아닌 특별권력관계상의 야수적인 집행으로서 국민을 대한점이 있었으며, 설령 위 상황을 내전 내지는 테러로 이해한다고 해도 저항의지가 없는 교전 당사자, 혹은 연행(포로)상태인 교전 당사자에 대해 폭력이 이루어 진것에 대해서는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다고 생각하기에, 정부의 폭력 진압에 대해선 명백하게 반대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읽을 사람이 몇이나 읽을지 모르겠지만, 위는 모두 공법상의 비난이다. (물론 본인의 개똥법학이 섞여있기에 지적을 바라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면 사인의 일반적 폭력행위에 대한 사법상 비난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난할만큼 한것 같아서 반복하지 않는다. 허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에는 반대하지만 동시에 폭력에도 반대합니다." 라는 문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두고 싶다.
또한 위의 총론의 논의와 연계시켜 생각할 떄, 컨테이너 박스는 "효율성"면에서는 좋았을지 몰라도 오히려 사람들을 더 많이 자극하는 효과를 냈다는 걸 지적하고 싶으며, 이에 대해 우** 교수는 기호학에 대한 이해가 적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나는 오히려 저분들이 너무 일을 열심히 한 나머지 이성(말 그대로, 동성이 아닌 이성)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개똥 마초경영학에서 흔히 말하는 "여자를 잘 후려야 사업을 잘 할 수 있다"에는 그 천박한 표현을 제거하고 이해해 볼때, 대체로 상대되는 성, 즉 "타자"의 활동에 대해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데, 대개 비슷한 맥락을 어떤 분은 기호학에 대한 이해부족 미묘한 점까지 간파해서 생각하고, 나는 천박한 글귀를 떠올리니 대저 공부가 얼마나 더 필요한지 가늠하기 힘들다.
6. 모 일보 광고 압박 및 불매운동에 관하여
여기에 대해서 나는 사람들이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불매운동 자체는 기본적으로 정보의 비대칭성 및 시장의 불비정보 상황을 해소하는 행위 아닌가? 난 오히려 기업주들은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거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있다. 첫번째로,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개인의 선호체계에 대해 감놔라 배추놔라 하는 경제학 이론을 본적은 없는 것 같은데, 비록 소비자이론이 완비성과 이행성, 강단조성 등이 만족되는 합리적 소비자를 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전편찬식 선호를 가진 사람을 경제 활동에서 내쫓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며, 현재의 상황은 광고로 인해서 소비자의 소비에 대한 기회비용이 이전보다 높아졌다는 사실을 광고주에게 알리는데에 주 목적이 있는데, 이러한 선호체계의 변화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무엇이라 하는것은 용납할 수 있으나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생각은 좀 에러인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현재 각종 사회적 차별의 원인(외모지상주의 등등)을 경제학 쪽에서는 수요자의 선호체계상 차별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왜 거기에 대해서는 온정적 간섭주의를 적용하지 않으면서 굳이 광고주에게는 그런 문제를 적용하는가라는 형평성 문제도 제기되고, 동시에 다양한 선호체계에 대해 이제까지 잘 인정되 왔으면서 왜 선호체계의 변화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도 모르겠으며, 선호체계의 변화를 통해 최적 배분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바꿔야 하는건 시장 체제 혹은 소비자 이론이지 선호체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성질이 바뀌면 이론이 따라 바뀌어야지 이론에 맞춰 성질을 바꾸라고 하는건 주객이 전도된거 아닌가 싶다.
둘째로, 기업주들이 고마워 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수요조사 - 편향되긴 하였지만 - 를 대신 해주고 있는 셈 아닌가 시위대가? 더군다나 모처의 광고에 대한 깡패짓은 심지어 어리디 어린 이 학부생의 귀에까지 들어왔을 정도로 그 참람함이 도를 넘은 바 단기적인 신뢰와 성과의 바꿈은 결국 장기적으로 신뢰도를 하락시켜 성과를 낮추거나 그 변동성을 크게 만드는 것으로 실증연구가 루카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이번 불매 운동에 대해선 오히려 외부경제에 따른 시장의 불비정보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서 그것을 지원해야될 필요성까지 느낀다.
7. 과학주의에 대하여
대개 이번 시위는 과학에 대한 무지의 소치를 통해 일어났다는것이 정설인듯 싶고, 나도 "과학"이란 맥락에서는 그말에 동의하나 사회적 맥락에서는 좀더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건 여기서 할 말은 아니고, 사실 쿨게이라는 단어에 속하는 모처의 m******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즐겨보던 블로그이기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통해 내 입장과 매우 일치하는 어떤 개념이 퍼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좋아한다. 그것은 "과학이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라는 명제이다. 그분의 FAQ에도 볼 수 있듯 그분은 매우 편파적 성향을 가지며, 따라서 나는 과학에서의 팩트를 따질 경우 그리 큰 돈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m모 님의 견해를 100% 지지할 수 있으나,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는 그분을 매우 싫어하는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글을 보고 과학 = 공정성(정치적)의 견해를 파기하는 것 같아 매우 기분이 좋다. 실제로 공정성의 개념, 사회의 이해의 틀로서의 사실 혹은 사태(비트겐슈타인)와 과학안에서의 팩트의 개념은 미묘한 차이를 함의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이 미묘한 차이는 꽤나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회과학, 인문과학이 물리학 중심주의를 따르려고 하는 것 같다. 마거렛 미드가 이를 비판한 말이 있는데 생각이 잘 안난다. 하여간, 나는 물리학 중심주의 내지 환원주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물리학 내에서 이루어질 경우에야 뭘 하든 상관 없지만, 물리학 이외의 곳에서 타 학문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학과를 타 유사 학과에 대해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런 점에서 소칼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최근 모처의 라캉-철학 관련 논의 역시 나같은 무지렁이가 낄 수준이 아니라 그저 보기만 했지만, 타 학과의 세상에 대한 이해(형식논리와 비형식 논리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의)에 대해 자신의 방법론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만약 자신의 목적이 플라톤주의적인 (진선미의) 이데아의 추구라면 더더욱 "인류학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문화의 이해 측면에서도 그렇고, 근대 자본주의에 의한 문화의 포섭이 아닌 플라톤주의자의 경우에는 더더욱 상대방 문화 혹은 상대방의 이데아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그로부터 공통요소를 통해 선의 이데아를 추정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플라톤주의자에 해당하는 말일 뿐이고, 사회구성론자 혹은 지식사회학 계열의 과학자에게는 이런 류의 논의가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위 글의 논의가 어디까지나 물리학 이중전공신청서를 낸 예비학도로서 물리학과 뿐 아니라 타 사회과학 내지 인문학에 대해 학문적 열등감을 약간 가진 경영학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의해야만 한다.
일단 졸려서 여기까지. 다음에도 또 적어야 겠다.
아, 이제 이 블로그는 독서블로그로 운영할듯.
밸리에 올릴까 올리지 말까 생각중이나, 이 글의 경우 밸리에 올리되 합리적인 비판, 비평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시 리플을 차단할 듯 싶다. 비판을 듣고 싶은건 사실이나 굳이 카오스를 만들고 싶진 않다. 어차피 내가 제대로 된 전문가도 아니고, 학생의 입장에서 배우며, 동시에 하나의 모델을 세우고(정확히는 기존의 것을 변형하고) 반증해보려 하는 이상, 모든 의견을 다 듣기보단 하나의 정합적(Congruence)인 모델을 세우고 지켜나가며 수정해보는게 낫지 싶다. 어차피 이 모델의 진위 여부 판단에 목숨이 걸려있는 처지도 아니고, 전문가는 더더욱 아닌지라.
물론 오프라인 지인들은 언제나 그렇듯 리플에 뭘 써도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 올 지인은 세명 내지 네명으로 정해져 있는걸.
1. 명목변수와 실질변수의 관계
나는 s*********님의 분석을 꽤 좋아하고 신뢰하는 편이다. 그분과 내 의견은 일치할 때가 많은데, 한가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위대의 진짜 목적에 관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공학적 신뢰"가 충족 된다면 어차피 쇠고기의 안전성은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는 시위대의 모습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시위대의 목적을 암묵적으로 s모 님께서 "쇠고기 안전성"으로 이해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근데 시위대의 실제 구호는 "검역 주권"이고, 이는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분명히 차이를 달리한다고 본다. 즉, 쇠고기 안전성이 실질 변수라면, 검역 주권은 명목 변수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 둘의 차이를 명료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About.com의 설명을 빌려보면 "Generally a real variable, such as the real interest rate, is one where the effects of inflation have been factored in. A nominal variable is one where the effects of inflation have not been accounted for." (http://economics.about.com/cs/macrohelp/a/nominal_vs_real.htm)로 되어 있다.
현재의 결과를 보면 정부로서는 할만큼의 추가 협상을 해서 실질적으로 달성하지 않았느냐고 하고 있고, 이는 QSM의 여러 문제점 및 WTO 제소 가능성을 논외로 하고 볼때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애초에 시위대가 원한건 "쇠고기의 안전성"이 아니라 "검역 주권"이고, 언제나 그렇듯 이런 상징물은 "물화"되어 나타날때 큰 효력을 발휘한다고 보는데, 예컨대 태극기가 6월 25일 현충원에서 쓰일경우 "자유한국"의 물화이지만 시위대나 광주에서 쓰일 경우 "해방민중"의 표현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시위대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보여지고, 따라서 불안한 시위대는 그들의 요구에 관한 실질 변수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ㅂ모님과 F모님의 인원 추산 논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대리할 실질 변수를 인원수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가 했어야 될 것은 추가 협상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즘에 입각한 통치행위 였으며, 그런 면에서 s*****님(다른 분이다)의 계란이라도 맞고 오라는 지적은 타당했다. 즉, 시위대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물화"된 상징물이지, 쇠고기의 안전성이 아니다. 그들 개개인은 실질적 쇠고기의 안전성을 판단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집단지성(이 용어를 왜 여기서 쓰는지에 대해서는 밑에서 후술할 것이나, 한가지 밝혀둘 것은 난 마케팅 용어를 싫어하기에 쓰다가 나도 모르게 공정성을 벗어난 흔적이 보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다.)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2. 정부 대응의 문제점
위에서 제기한 시위대의 뜻하는 바가 맞다면, 정부야 말로 이 모든 재앙의 원흉으로 볼 수 있다. 때때로 열의에 넘치는 딜레탕트는 자신이 모든것을 다 할 줄 알고, 자신의 생각이 합리적인 만큼 당연히 설득하면 따라주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한가지 근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어도 딜레탕트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 등의 자원이 부족하며, 설령 자원마저 만족되더라도 그들의 선호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저 멀리로 잠시 넘기기로 하고, 조금 다르게 보면 최근 시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야 말로 최적 정책의 시간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간단하게 한 국면을 분석해 보면, 1일 폭력 진압 이후 10일까지 정부는 비폭력으로 대응 하다가,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 갑자기 시위대에 대한 폭력적 대응으로 맞서는데, 이는 시위대가 1일 이후 시위의 저항 정도 D1으로 설정하고 행동했다가, 그간의 정부의 약한 진압을 통해서 정부에게 시위의 저항 정도 D2 (, D1>D2)를 결정하자 정부의 손실함수의 최적해는 "지키기"에서 "때려잡기"로 변한것이며, 이를 통해 시위대의 저항정도는 D3 (D3>D1)으로 바뀌어 결국 손실함수의 값이 올라가 버린 꼴이 된다.
이런 면에서 정부에게 준칙을 강요하는 자들은 정부의 이런 대응에 대해서 비판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는데, 다만 이런 관점은 정부의 대응의 변화를 목적식의 시위대 통제 변수의 변화과정으로만 보게되는 분석의 틀의 단점이 있다. 이 경우에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을 통한 분석이 계량적 요소는 조금 떨어져도 훨씬 정합적으로 보여지는데, 특히 벡의 주장 자체가 위와같은 "명목 변수로서의" 위험에 대해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그 분석을 여기에 적용하자니 하자니 기껐해야 한번 읽고 정리도 안해서 생각이 안나니까 패스. 언제 시간나면 읽고 분석에 적용해 봐야겠다.
사실 이 문단에서 하고팠던 말은 시위가 사그라들 수록 그에 불을 지른 것은 정부의 대응이었다고 보는데, 이는 정부가 근본적으로 시위의 문제를 "실질 변수"에 국한 시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잘못 여부 판단은 매우 힘들다고 여겨지는데, 예를 들어 그녀가 매우 기분이 안좋은데 거기다 대고 진정으로 애인의 기분을 걱정해서 "프로작 두알이면 나아질거야"라고 던지는 그녀의 애인의 잘잘못을 평가해보라는 것과 같은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조금 다른의미에서, 남자에게 돌을 던질수 있는지가 그닥 많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건 실질 변수가 아닌 명목 변수였을 것이다. 나로서는 추가협상 보다는 차라리 국민들 앞에서 어청수를 대동하고 나온다음에 눈물 한번 흘리고 "이 개새*야!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한 뒤 직접 사과하는 퍼포먼스가 효과는 훨씬 좋았으리라 생각된다.
3. 집단 지성 논의와 관련해서
사실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2번에서 던질게 아니라 3번에서 던졌어야 한다고 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번에서 던진건 정부의 대응책과 인간에 대한 관점 - 합리적 경제인- 은 빼놓을 수 없는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집단 지성의 논의부터 검토하기로 하자. 난 사실 웹 2.0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케팅 용어이고(이미 상표등록이 되어 있다), 불확실한 통계적 자료에 근거해 있으며, WWW의 창시자 팀 버너스 리가 말했듯 이미 예정된 방향을 새로운 용어로 이름 붙인것일 뿐이라 생각된다. 웹 2.0은 마치 그것이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특징이 아닌,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인 양 호도 한다. (오히려 마셜 맥루한의 관점에서 웹 2.0이 지적하는 여러 특성은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최근의 마케팅적 용어 정의에 의한 집단 지성의 표현은 논의를 각하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집단 지성을 일명 창발성(emergent)와 관련해서 사용할 경우이다. (왜 흔히들 말하는 아프리카인들은 옛날부터 프랙탈 모양으로 집을 지었다거나, 도시의 발전경로는 대개 일정하다거나 등등.) 이경우에는 시위대의 행동을 집단 지성이라 볼 충분한 여지가 있다. 물론 이 경우 창발성은 플래시몹과 관련해서도 충분히 쓰일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의 집단 지성은 일종의 라이프-게임에서 개개의 라이프 들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통계적 양상으로 밖에 볼 수 없는데, 이런 지점에서 집단 지성의 역할은 제한되어 있다. 사람들은 위키피디아를 보고 집단 지성이라고 극찬하는데, 사실 그들의 행위는 "1.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사전의 내용을 비교한다. 2. 있고, 자신의 정보와 동일하다면 다음 정보를 검색한다. 3. 있으나 동일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보가 우월하다면 자신의 정보를 복사하고, 사전의 정보가 우월하다면 사전의 정보를 자신에게 복사한다. 4. 없다면 채워넣는다. 5. 다시 1부터 반복한다." 라는 5개의 프로세스를 가진 라이프 게임의 프로세스로 비유할 수 있으며, 물론 이것이 만들어 내는 심히 창대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뿐이다. 그것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은 블랙박스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인지과학을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부분에 대한 나의 무지를 채워주셨으면 좋겠다. 어쨌든 시위대가 창발적이라고 생각할때, 이들의 프로세스는 대략 "1. 시위에 나가지 않으면 MB의 행적을 보고 분노한다. 2. 시위에 나간다. 3, 이 게임의 참여 여부에 대해 몇몇 요소들에 대한 판단에 의해 동의/비동의의 분기가 이루어지고, 동의는 1부터 반복, 비동의는 게임을 이탈한다" 정도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런 분석은 비록 과도하게 인간에 대해 단순화 하긴 했어도 어느정도 타당한 면이 있고, 이를 집단지성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3.1. 판단 능력의 검토
문제는 이렇게 이루어진 집단 지성이 어떤 판단 능력을 가지는가 이다. 즉,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가"라는 면에서 볼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하게, 프로그래밍에서 수만개의 프로세스를 일일히 스파이로 프로세스에 대해 후킹을 하는 것 혹은 서버 내에 연결된 수만개의 컴퓨터에 대해서 동시에 IP spoofing을 시도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즉, 논리적으로 가능하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어떤 판단에 기대한 책임을 갖기 어렵다. 이는 과거의 운동과 대비되는 지점인데, 과거의 상명하복 식의 운동의 경우 머리가 있었으나, 지금의 경우 집단 지성이란 이름 하에 모두가 한 거대 세포를 이루는 단세포의 일부가 되어 버린것과 비슷하며, 이들에 대해서는 셀레늄을 쳐바르던가 하는 류의 처방이 필요한 것이지, 예측이 필요하진 않다. 어차피 당신의 예측은 틀리거나, 맞아봤자 이미 대처하기엔 늦을테니까.
이 경우 기존의 지휘부로 불리던 사람들은 이들 개별 라이프들이 수집하는 몇몇 정보를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대의 민주제하 정당이 일종의 투표거래(logrolling)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과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효율적인 공급책들은 동시에 이들 개별 라이프들의 행동에 통제를 가할 수 있는 병목(bottleneck)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정보의 유통 속도 결정과 신뢰성 결정을 동시에 해서 시위의 행동을 어느정도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것이다. 물론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의미와, 정보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고리라는 의미에서, 경영학의 생산 및 운영이론의 용어로서 병목이란 용어를 들여온 것이다. 이때, 최근 정부처럼 대책위, 즉 병목을 때려잡게 되면 정보의 신뢰도의 저하로 인해 개별 라이프들은 카이사르 말마따나 "소문의 노예로서,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짓을 하게 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방금 전 문장의 표현은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말한 것이며, 실제로 이 라이프 게임 안에서는 그들이 믿는 모든것은 그들에게 팩트로서 구성되게 된다.)
만약 저 병목들이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 한다면 어느정도 통제 가능성이 있는 집회라고 볼 수 있으나, 병목의 역할이 사라질 때 개별 라이프, 혹은 라이프 집단들은 새로운 병목을 만들게 되며, 그에 따라 집단적 행동이 분산되고, 따라서 각종 시위가 "창궐"하게 된다. (창궐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병목이 있던 경우라면 실질 변수를 명목 변수로 번역해주는 누군가를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처럼 정부가 지휘부를 파괴하는 것으로 대응한다면 시위는 일시에 창궐하다가 곧 사그러질 것이고, 그게 우리가 지켜본 사제단 출현 직전의 상황이다.
이 문단의 결론은 집단 지성에 의한 시위대의 판단은 병목을 통한 정보 흐름에 대한 개별 라이프의 판단으로 정해지기에 어떤 일정한 값을 가지기 어려우나, 역치값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4. 개인의 분화, 혹은 사라짐.
선호 체계만으로 모든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것 같다. 여기는 좀 할이야기가 많으니 패스.
이제는 각론들.
5. 폭력 진압에 관하여
나는 사르트르의 글귀에 아직도 찬동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행정법학의 발전 과정이 특수권력관계를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끌어내리고 동시에 행정부 역시 법 아래에, 정확히는 법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 판단 아래에 구속시키려 하며, 그 공정력의 인정은 법적 안정성의 인정일뿐 법률적합성에 대한 판단은 달리해야된다는 것과, 37조 2항의 비례원칙상 살펴볼때, 구성요건적 효력을 가진 행정 행위를 발급할 수 있는 주체는 그만큼의 의무, 즉 하자없이 공정하게 법률상의 권한을 해석해야 하는 의무가 일반 사인에 비해 더 강하게 요구된다고 볼 수 있고, 합헌적인 시위를 하고 있는 시위대에게 수인하명을 하기 위해서는 가두 시위 금지의 경우에는 집시법이 해당될 지 몰라도 권력적 사실행위(구타, 살수 등)의 경우에는 고시나 훈령만으로 인정될 수 없고, 경직법 상 개괄적 직무 조항만으로는 그것을 정당화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경찰 소극의 원칙에 충실해서 오히려 청와대 안쪽으로 시위대를 끌어들여서, 즉 동십자각과 경복궁을 막는 것이 아닌 청와대 양 문을 막아 지키는 것이 광화문의 정상적 차량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전경들의 행위에서 경직법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법적 집행이 아닌 특별권력관계상의 야수적인 집행으로서 국민을 대한점이 있었으며, 설령 위 상황을 내전 내지는 테러로 이해한다고 해도 저항의지가 없는 교전 당사자, 혹은 연행(포로)상태인 교전 당사자에 대해 폭력이 이루어 진것에 대해서는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다고 생각하기에, 정부의 폭력 진압에 대해선 명백하게 반대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읽을 사람이 몇이나 읽을지 모르겠지만, 위는 모두 공법상의 비난이다. (물론 본인의 개똥법학이 섞여있기에 지적을 바라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면 사인의 일반적 폭력행위에 대한 사법상 비난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난할만큼 한것 같아서 반복하지 않는다. 허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에는 반대하지만 동시에 폭력에도 반대합니다." 라는 문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해두고 싶다.
또한 위의 총론의 논의와 연계시켜 생각할 떄, 컨테이너 박스는 "효율성"면에서는 좋았을지 몰라도 오히려 사람들을 더 많이 자극하는 효과를 냈다는 걸 지적하고 싶으며, 이에 대해 우** 교수는 기호학에 대한 이해가 적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나는 오히려 저분들이 너무 일을 열심히 한 나머지 이성(말 그대로, 동성이 아닌 이성)에 대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개똥 마초경영학에서 흔히 말하는 "여자를 잘 후려야 사업을 잘 할 수 있다"에는 그 천박한 표현을 제거하고 이해해 볼때, 대체로 상대되는 성, 즉 "타자"의 활동에 대해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데, 대개 비슷한 맥락을 어떤 분은 기호학에 대한 이해부족 미묘한 점까지 간파해서 생각하고, 나는 천박한 글귀를 떠올리니 대저 공부가 얼마나 더 필요한지 가늠하기 힘들다.
6. 모 일보 광고 압박 및 불매운동에 관하여
여기에 대해서 나는 사람들이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불매운동 자체는 기본적으로 정보의 비대칭성 및 시장의 불비정보 상황을 해소하는 행위 아닌가? 난 오히려 기업주들은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거 아닌가하고 생각하고 있다. 첫번째로,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개인의 선호체계에 대해 감놔라 배추놔라 하는 경제학 이론을 본적은 없는 것 같은데, 비록 소비자이론이 완비성과 이행성, 강단조성 등이 만족되는 합리적 소비자를 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전편찬식 선호를 가진 사람을 경제 활동에서 내쫓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며, 현재의 상황은 광고로 인해서 소비자의 소비에 대한 기회비용이 이전보다 높아졌다는 사실을 광고주에게 알리는데에 주 목적이 있는데, 이러한 선호체계의 변화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무엇이라 하는것은 용납할 수 있으나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생각은 좀 에러인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현재 각종 사회적 차별의 원인(외모지상주의 등등)을 경제학 쪽에서는 수요자의 선호체계상 차별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왜 거기에 대해서는 온정적 간섭주의를 적용하지 않으면서 굳이 광고주에게는 그런 문제를 적용하는가라는 형평성 문제도 제기되고, 동시에 다양한 선호체계에 대해 이제까지 잘 인정되 왔으면서 왜 선호체계의 변화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도 모르겠으며, 선호체계의 변화를 통해 최적 배분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바꿔야 하는건 시장 체제 혹은 소비자 이론이지 선호체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성질이 바뀌면 이론이 따라 바뀌어야지 이론에 맞춰 성질을 바꾸라고 하는건 주객이 전도된거 아닌가 싶다.
둘째로, 기업주들이 고마워 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수요조사 - 편향되긴 하였지만 - 를 대신 해주고 있는 셈 아닌가 시위대가? 더군다나 모처의 광고에 대한 깡패짓은 심지어 어리디 어린 이 학부생의 귀에까지 들어왔을 정도로 그 참람함이 도를 넘은 바 단기적인 신뢰와 성과의 바꿈은 결국 장기적으로 신뢰도를 하락시켜 성과를 낮추거나 그 변동성을 크게 만드는 것으로 실증연구가 루카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이번 불매 운동에 대해선 오히려 외부경제에 따른 시장의 불비정보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서 그것을 지원해야될 필요성까지 느낀다.
7. 과학주의에 대하여
대개 이번 시위는 과학에 대한 무지의 소치를 통해 일어났다는것이 정설인듯 싶고, 나도 "과학"이란 맥락에서는 그말에 동의하나 사회적 맥락에서는 좀더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건 여기서 할 말은 아니고, 사실 쿨게이라는 단어에 속하는 모처의 m******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즐겨보던 블로그이기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통해 내 입장과 매우 일치하는 어떤 개념이 퍼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좋아한다. 그것은 "과학이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라는 명제이다. 그분의 FAQ에도 볼 수 있듯 그분은 매우 편파적 성향을 가지며, 따라서 나는 과학에서의 팩트를 따질 경우 그리 큰 돈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m모 님의 견해를 100% 지지할 수 있으나,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는 그분을 매우 싫어하는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글을 보고 과학 = 공정성(정치적)의 견해를 파기하는 것 같아 매우 기분이 좋다. 실제로 공정성의 개념, 사회의 이해의 틀로서의 사실 혹은 사태(비트겐슈타인)와 과학안에서의 팩트의 개념은 미묘한 차이를 함의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이 미묘한 차이는 꽤나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회과학, 인문과학이 물리학 중심주의를 따르려고 하는 것 같다. 마거렛 미드가 이를 비판한 말이 있는데 생각이 잘 안난다. 하여간, 나는 물리학 중심주의 내지 환원주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물리학 내에서 이루어질 경우에야 뭘 하든 상관 없지만, 물리학 이외의 곳에서 타 학문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학과를 타 유사 학과에 대해 우위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런 점에서 소칼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최근 모처의 라캉-철학 관련 논의 역시 나같은 무지렁이가 낄 수준이 아니라 그저 보기만 했지만, 타 학과의 세상에 대한 이해(형식논리와 비형식 논리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의)에 대해 자신의 방법론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만약 자신의 목적이 플라톤주의적인 (진선미의) 이데아의 추구라면 더더욱 "인류학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문화의 이해 측면에서도 그렇고, 근대 자본주의에 의한 문화의 포섭이 아닌 플라톤주의자의 경우에는 더더욱 상대방 문화 혹은 상대방의 이데아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그로부터 공통요소를 통해 선의 이데아를 추정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플라톤주의자에 해당하는 말일 뿐이고, 사회구성론자 혹은 지식사회학 계열의 과학자에게는 이런 류의 논의가 필요가 없을 것이다.
허나 위 글의 논의가 어디까지나 물리학 이중전공신청서를 낸 예비학도로서 물리학과 뿐 아니라 타 사회과학 내지 인문학에 대해 학문적 열등감을 약간 가진 경영학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의해야만 한다.
일단 졸려서 여기까지. 다음에도 또 적어야 겠다.
아, 이제 이 블로그는 독서블로그로 운영할듯.
# by | 2008/07/04 02:25 | 잡담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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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오래간만입니다. 잘 지내십니까.
5. 폭력진압 부분의 ~~공법상의 비난이다에서 한번 피식 웃고*(악의는 없습니다) 6. 경제학에 무지해서 거의 못 알아들었습니다만 저는 특정지면언론 광고주 불매운동을 (행위자에 편향적인 관점에서) 목적달성을 위한 효율성과 규모의 적절성만 갖고 이해하려는 참이라서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요.
7. 과학주의 부분을 언급하신 의도를 제가 바로알아들었는지 오독했는지 자신없어서 졸린김에 뭐라고 길게 적었는데 다지우고 이중전공신청서 부분에서 또 슬며시 웃었다는것만 말씀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잘보았습니다.
6번 부분은, 완전경쟁시장의 기본 전제는 완전정보이고, 현재의 소비자불매운동은 그 완전정보를 달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7번 부분은 저야말로 졸면서 쓴터라;;;;;ㅠㅠ 다시 읽어보니 매우 이상하네요;; 요즘은 시간이 많으니 곧 이에대해 추가 포스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