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11일
그 많던 믿음은 누가 다 만들었을까?
우리 편(?)의 정체(sonnet님)
자그니와 sonnet의 논쟁 정리(자그니 님)
사기꾼과 폭로자의 구도(하늘빛마야 님)
"우리편 전문가" (2071 님)
1. 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좋은 논쟁을 이끌고 간 링크의 분들께 감사를 표한다. 한번 다 읽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물론 읽지 않으실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본론으로 바로들어가기 뻘쭘한 나를 위해서 약간의 정리와 함께 새로운 논점을 도출해보자. 현재의 논의의 중심구도는 "우리 편이란 누구인가?"로 되어 있다. 당연하다. sonnet님의 글은 자그니 님의 접근법인 우리편에 대해서 그는 우리라고 속칭되는 "다수 대중의 편"이 아님을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금융 부분이 실제로는 소수의 이해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잘 지적해 주셨다. 2071 님은 진짜 우리편
이제 이글이 제기하려는 논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처음 joyce님의 댓글에서 인식했고, 하늘빛마야님과 2071님의 글을 읽음으로서 구체화된 논점이다. 즉, 왜 사람들은 이준구 교수님 대신 미네르바를 더 믿었을까? 즉, "왜 사람들은 미네르바를 믿었을까?" 분명 주변에 전문가들이 없는것도 아닌데? 충분히 인터넷이 많은 정보를 줄수 있는 세상인데? 이에 대해서 2071님과 하늘빛 마야님은 각각 암묵적으로, 혹은 외적 요인을 통해 설명하고 계신다. 2071님 께서는 "전문적인 내용을 쉽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고, 그러면서 간결하면서, 게다가 인기를 끄는 건 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함으로서 암묵적으로 이 문제를 인기의 문제로 끌고 갔다. 하늘빛마야 님은 이 문제를 외적 요인, 즉 이명박 정부의 무능함으로 이끌고 갔는데, 이는 " 미네르바에 대한 시민 일반의 지지와 옹호는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와 경제 전문가라는 작자들은 대체 무얼 했는가!"라는 탄식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원 글에서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르게 설명할 수 있을만한 몇몇 접근을 소개하고, 그 타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2. 가설 1 - 벌써 100년이 되어가는 지식인 떡밥
사실 이 논의구도는 한가지 지난한 떡밥을 담고 있다. 요새는 논술학원에서도 가르친다고 해서 좀 식겁한 떡밥이긴 한데, 바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떡밥이다. 주로 인용되는 사르트르의 주장을 살펴보기로 하고, 그후 짤막하게 그람시의 주장을 살피도록 하자.
(1) 사르트르
자세한건 직접 읽도록 하고, 간단히만 소개해보자.
지식인은 쁘띠부르주아이기에, 그가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려면 그는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고 있는 계층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밖에서 바라보려면 이데올로기가 부정하는 존재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이데올로기를 갖출 것이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생긴다. 무산계급에서는 특권과 보편 사이의 모순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 발생할 수 없다. 또한 부르주아지 출신 지식인은 무산자가 아니기에 대중과는 유리되어 있다. 위의 문제들은 지식인에게 아무런 역할도 맡겨지지 않았음을, 따라서 지식인 스스로가 자신에게 역할을 부여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지식인은 지배 계층에서도, 버림받은 계층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그는 버림받은 계층의 자각을 도우려 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계급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이데올로기를 억제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행함과 동시에 버림받은 계급과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지식인의 임무는 하층계급 안의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의 투쟁, 대중의 문화적 기반 구축, 버림받은 계급안의 유기적 지식인에 준하는 전문가 형성, 지식인 고유의 목표 회복, 현재 행동의 급진화, 역사적 목표의 수호자 등이다. 지식인은 그 자신들 간의 대립에 있어서 변증법적인 해결책을 취해야 한다. 지식인은 자기 모순속에 살면서 모든 사람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출처 : 어렸을적-_- <지식인을 위한 변명> 독서노트
여기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몇가지 함의점이 될 만한 것을 파란색으로 칠해보았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속에서 태동한 자라는 말은 사실 미네르바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봐도 스스로를 쁘띠 이상으로 여겼을것 같지는 않은데, 그의 의식 안에서는 그 스스로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태동한 것이라 느꼈을 수 있다. 원래 소설이란게, 특히 1인칭 주인공시점의 소설 내지는 짤막한 행위극을 쓸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 하지 않는가. (그가 만약 현재 체포된 자와 동일한 사람이라면, 아마 그는 글을 쓰는동안 이를 의식하고 썼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아고라에서 그가 50대에 상위 1%중 극상층 0.1%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이 떠도는 것을 보라. 이는 그가 글을 쓰는 도중에 퍼진 소문으로 알고 있는데, 50대에 금융 지식에 해박한 사람은 사실 우리시대가 나타내는 부르주아, 그것도 상층의 부르주아에 대한 표상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가 보편계급을 위해 일한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계급 논쟁에서 서민이라는 단어가 차지하는 힘은 약하지 않다. 즉, 그가 느끼기에 현재의 가장 소외받는 계급, 이데올로기가 부정하는 계급은 "서민"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의식을 서민층으로 규정하는 아고라의 사람들과 의식적으로 맞아 떨어질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가 환영받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서민이라는 계급이 이데올로기의 소외를 받고 있는 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서민"으로 규정되는 계급은 룸펜부터 쁘띠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렇기에 애초에 서민이야 말로 룸펜, 프롤레타리아, 쁘띠의 요구를 대신하기 위해 - 혹은 (적당한 사회학 단어가 있었는데 생각이 안난다... 암튼) 진짜 그들의 개별적 요구를 감추고 허수아비화하기 위해 - 만들어지고 관심받아 왔기 때문이다. 즉, 서민이야 말로 "이데올로기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계급인 것이다.
어쨌든 그가 느끼기에 현재의 보편계급 "서민"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그 버림받은 계층의 자각을 도우려 하고, 구체적 행동을 마련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각종 경제지식, 예측을 해왔고, 그것의 경제학적 함의와는 무관하게 예측이 맞은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서민층에서는 그를 또다른 전문가, 부르주아가 아닌 자신과 의식을 공유하는, 자기 계급을 대변하는 "지식인"으로 여겨온 것이다.
(2) 그람시
미네르바의 경우 그람시의 논의를 빌려서도 설명할수 있으나 그 설명력이 그리 큰것 같진 않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론은 이를테면 각자의 노동 속에서 그에 대해 머리를 써서 구체화시킬수 있게 되고, 여기서 획득한 논리를 사회 등에 투사시켜서 생각을 정립할때 탄생하는 것이 바로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것인데, 일단 박씨는 룸펜이기에 어떤 일을 함으로서 논리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위에서 논증한대로 "서민"이란 계급이 애초에 기만적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3) 가설들이 주는 함의
전반적으로 사르트르의 이론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다만, 사르트르 문단에 있어서 "기만적" 계급과 진짜 계급이라는 일종의 이분법적 구도는 내가 슬쩍 넣은 것이다. 따라서 이부분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것 같은데, 이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와 같은 책에서도 던지는 문제의식인 만큼 같이 읽고 공부하도록 하자(?) (즉, 솔직히 말해서 내 분석이 그대로 적용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아직은 학부생, 그것도 인문대 생도 아니고 경영대 생이라 ㅇㅅㅇ)
3. 가설 2 - 주체의 문제
두번째로 주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나도 잠은 자야 하니까 이부분은 인용없이 설명하도록 한다. 추후 시간이 되면 출전이나 소스를 달도록 한다.
일반적으로 근대의 기본 논의는 주체에 기반하여 이루어져 왔다. 주체라 함은 이성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이성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는 좀 많이 큰 인식론적인 면과 동시에 선험적으로 이성의 기반이 갖춰져있다는 (칸트식의) 약간의 존재론, 그리고 자유를 향해 전진해 가야 한다는 약간의 윤리학적인 성질을 가지는 개념을 말한다. 이는 주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sonnet님이 제기한 문제를 다시 풀어헤칠수 있다. sonnet님은 ""우리"가 우리나라의 대중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그의 조언은 확실하게 우리의 이익에 반하는 해로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를 간단한 논증을 통해 드러내셨다. 그런데도 일반 사람들은 미네르바를 믿었다. 왜 사람들이 믿었는지에 대해서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주체 개념을 밀고 나가는 경우
일반적인 믿음,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권리를 가지며... 로 시작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두가지 방법을 쓰게 된다. 하나는 사람들은 충분히 합리적이기 때문에, 그딴거 생각할 시간에 다른것을 생각하는게 더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좀 설명력이 떨어진다고 보는데, 미네르바의 전문(?) 영역이었던 펀드 부분을 보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속에서 생각할 시간을 현재 자신이 가진 총 금액에서 쓰는 부분만큼만 생각한다고 가정할때, 펀드 투자는 충분히 총 금액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어느정도 정보를 찾거나 위험을 헷지하는데 시간을 기울였을 터인데도 펀드에 투자하고, 심지어 최악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펀드런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보아 알수 있다.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주장, 즉 비록 사람은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나 때때로 근시안적이고, 위험에 대한 개념이 없었으며, 증권사에서 무리한 마케팅을 펼쳤고, 위험 고지 제도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미네르바를 믿고 투자를 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경우 향후 미네르바같은 이들이 나와서 잘못된 분석을 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바로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아마 대충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기본적인 개념들, 이를테면 VaR과 같은 리스크 분석의 개념이라던지, Markow Chain등을 이용한 통계에 기초한 포트폴리오 짜기, 심지어 재무제표를 읽을수 있는 방법등을 가르쳐야만 한다는 주장이 나올수도 있다. (즉 2071님의 포스팅의 전제이기도 하다.)
(2) 주체 개념의 폐기
이와 다르게, 주체라는 개념이 현대에 와서 그리 정확지 않다는 주장이 나올수 있다. 이 주장은 "권리와 의무"라는 잘 조율된 인권, 아니 "인간으로서 대접받는 상황"을 어느정도 위협한다는 측면이 있으나, 오히려 분석의 측면에서는 좀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는 것 같다.
이 주장은 애초에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또한 논리가 논리로서가 아니라 감정과 뒤섞인 상태로 전달될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전제 하에서는 미네르바는 그들의 감정을 먼저 충족시켜주었기에, 그의 논리가 설령 좋지 않고 심지어 정부의 전문가들이 그의 분석을 완전히 뒤엎는 논평을 내어놓아도 그가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켜주었기에" 옹호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이 블로그 주인장이 좋아하는(...) 블루어의 비형식적 논리에 관한 사례(아잔테 족이라는 부족이 있는데, 이들은 마법사가 있다고 믿고, 여기에 대해 공격이 들어오면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형식 논리를 창출한다. 즉, 거칠게 말해서, 사람들은 말꼬리를 안잡히기 위해서 형식논리를 만들어내지 원래 어떤 진리에 이르는 형식논리가 있다는것은 아니라는 사례임.)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과도 통하는 것 같다. 특히 비형식적 논리라는 개념에 따르면, 일반적인 경제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그외 진중권인지 박노자인지 다른 누구인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이런 상황을 한국의 구전문화로 돌리는 사람도 있었고, 김우재님의 경우에는 종교적 현상으로 돌린바 있다.
이 분석은 이상한 학자들을 막 세워놓고 주체니 타자니 이상한 용어들을 서술해놓아서 이해가 잘 안갈수 있는데, 간단하게, 황우석 사태를 생각하면 된다. 이미 학계에서 그의 주장을 폐기했는데도 서울대 정문에다가 북흐러운 글을 써놓는 그들을 합리적 주체의 개념안에서 설명하기는 매우 힘든것 같다. 좀더 이 문제에 대해 일반적이고 깊은 논의를 참조하고 싶다면 여성주의 쪽 글들을 보고, 이러한 분석틀이 왜 합리적 주체의 관점에서 설명하기 힘든가를 좀더 알고 싶은 사람은 포퍼가 "추측과 논박" 1권 어딘가쯤에 써놓은 음모론이 왜 사회과학이 될 수 없는가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라.
(3) 가설들이 주는 함의
주체 개념을 그대로 밀고가는 논의에서는 현재 상황에 대해 많은것을 얻을게 없다고 본다. 이 전제하에서는 인기를 얻어야 된다는 말은 곧 인기 그 자체에 대한 전략의 논의로 이끌게 할텐데, 과연 저널리즘에서는 무엇이 인기인가? 그리고 대중들에게 특정 문제와 관련된 저널리스트로서 인기를 얻는것보다는 애널리스트로 다른곳으로 가는것이 분명 우월전략인 상황에서는 언제나 인기있는, 쉽게 풀어주는 전문가는 사회적으로 과소공급될 것이라는 것이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널리즘에 정부지원금을 줄수 있는것도 아니다. 정부지원금을 주었다간, 자칫하면 전문가도 못건드리거나, 합리화해버릴수 밖에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생겨나 버리고, 그것은 확실히 표현의 자유에 비추어볼때 좋은 상황은 아니다.
주체 개념을 폐기하고 다른 설명을 찾는 논증은 우리에게 설명해줄 것이 많다. 다만 이것들은 앞으로 어떻게 이런 현상을 다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 현상을 다루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주어진 제도중의 하나의 수정을 요구할 것이고, 그것은 아마 근본적으로 제도에 가정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요구할 것이다.
4. 가설 3 - 진영논리
이 부분은 이미 인용한 하늘빛마야 님의 포스팅에서 잘 설명되었으므로 따로 다루지 않는다.
5. 결
왜 대중이 미네르바를 믿었는가에 관한 그냥 이것저것 생각나는 범위 내에서의 사실들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사실 위의 가설들은 별로 깊은 내용도 없거니와, 나는 그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저 가설이 나올수 있을만한 범위를 제시한것 뿐이고 기껏해야 방법론의 큰 방향정도만을 몇개만 나누어본것이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왜 이런 현상이 2000년대 한국에서 자주 발생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인것 같다. 이것은 사실 예전 한미연합사 관련 논쟁에서 sonnet님의 중요 문제의식 - 즉 왜 진짜 전문가 집단의 말이 무시되고 있는가 - 으로 볼수도 있고, 아니면 좀더 통시적으로 왜 인류사에서 음모론과 잘못된 믿음에 대한 boom-burst cycle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가란 질문을 던질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최근(5~10년)의 한국사회로 한정시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인류사에서 언제나 집단적 믿음이 존재해 온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정보간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정책결정집단과 피결정집단의 네트워크가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가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기능 (하나는 학계에서(황우석), 하나는 군사-안보 부문에서(연합사), 하나는 경제에서(미네르바))에서 그러한 잘못된 믿음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향후 한국의 좁게는 정책결정, 크게 봐서 거버넌스(..보다 넓은 개념이 만들어져야 할것 같은데, 그런 개념어를 잘 모르겠다. 여기에선 일반적인 거버넌스 뿐 아니라, 개인들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집단적인 영향들을 포함하기로 한다.) 전체의 의사결정에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좀더 탐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회구성원간의 효과적인 정보의 소통과 믿음의 공유(좁게는 대화부터 넓게는 똘레랑스 류의 예의있는 무시까지) 방식을 찾아나가야 한다.
6. p.s.
쓰고나니까 무슨 논술글도 아니고-_- 결론을 뭔가 멋있게 가설들간 비교평가를 쓰고 따라서 난 이가설을 지지한다! 이렇게 대놓고 쓰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제시한 가설중에 깊이있는것은 하나도 없구나(...) 싶어서 걍 지지하는 가설을 암묵적으로만 결론에 쓸수밖에 없었음..ㅠㅠ;;
무튼 讀者 諸賢의 많은 비평과 비판을 바랍니다 :)
# by | 2009/01/11 08:05 | 잡담 | 트랙백(2) | 핑백(1) | 덧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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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미 풀린) 오일러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다느니, 영구기관을 만들었다느니 하는 떡밥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무시당하죠. 사람들이 "객관적인 영역"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연과학이라는 필드에서 그들의 존재는 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a priori를 가지고 있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영역의 경우에는 이 문제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현대의 사회과학은 적지 않은 분야에서 이미 수학적 방법론과 게임 이론이 점령한 지 오래죠.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과학은 지배집단의 의사(혹은 음모)가 존재하는 한 맞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글루스도 과학(=자연과학) 밸리만 만들어 주겠습니까. T^T
crackpot 자체가 학계 내에 별로 없다는 말에 대해선 제가 그쪽을 잘 모르니 동의할수 밖에 없겠군요. 다만 앞으로도 황우석 같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이뤄질 수 있는 긍정적인 여건이 이미 존재하는것 같습니다. 황교수처럼 달리다굼- 과 같은 퍼포먼스를 하고, 약간의 네이처 논문 게재 및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충분히 일반 대중 중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특히 이 문제에서는 일반 대중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 논문의 학계에서의 위치 등을 설명해줄수 있는 '저널리스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심해지는 측면도 있다고 보입니다.
일단 시민들이 가장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조중동 한경한에 대해서도 다들 진영에 따라서 믿을놈 없다고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과학의 문제에 관해선, 말씀하신대로 거의 모든 사회과학이 "수학워너비"를 외치고 있는건 사실 입니다. 지배집단의 의사가 존재하는 한 맞지 않아라는 말에 대해선, 월러스틴 같은 이들은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 매우 정교하게 풀어쓴 새로운 사회과학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프리고진(예. 화학의 그 프리고진입니다)의 방법론을 차용해서 말이죠. (물론 비주류이긴 하지만 crackpot은 절대로 아닙니다.)그래서 사실 어느 쪽이 맞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 ^^;
댓글에 나온 자연과학이란 필드에서 왜 crackpot이 없는가는, (이상하 교수님의 논의를 빌리면)자연과학은 측정량이라는 절대적인 Constraints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회과학은 반복되는 측정량이라는 constraints가 존재하는 영역이 잘 없죠 ^^;
"황박이 쓴 논문 중에 포토샵이 있으면 어떻고 베낀 부분이나 재검증이 안 되는 부분이 조금 있으면 어떻냐? 전체적인 논지는 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반면 주석 하나만 학계의 관행에 어긋나게 달아도 가끔 욕 먹는 것이 학계입니다. 하물며 99%가 맞다고 해도 1%가 재현 불가능이라거나, 100장의 사진 중 1장만 포토샵이라면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겠죠.
물론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만, 주된 의견 차이 중 하나는 이것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그 추종자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한건 아니죠. 처음에는 당연히 맞는거라는 주장부터 시작해서 점점 현실이 아닌것으로 드러나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그래도 맥락이 맞으면 다 맞는거 아니냐 이런식으로 점점 입장이 후퇴해 간것으로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는 흔히 종교에서 종말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월 모일에 종말이 올것이다! 이렇게 떠들고 다니다가 그게 오지 않으면 다시 입장을 바꿔서 "그건 연기된거고 언젠가는 올것이다!"이러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이에 관한 내용을 심리학입문 시간에 들은것 같긴한데 출전이 기억이 안나네요;;;;;
1. 지식인떡밥
제가 과문해서 별로 할 수 있는 말은 없군요. 다만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or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지배계층에게 독점된 정보-엘리트의 언어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네르바가 한 일은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긴 했으나 그 내용상 자기주장을 한 것이니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야겠지요. 물론 제가 지식인에 대한 정의를 잘 짚고 하는 소린 아닌걸 감안해주시고(...)
3.(2) 주체 개념의 폐기
같은 얘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제 식대로 이해하자면 (결과를 두고 보더라도) 미네르바의 예측이 진짜로 맞았든지 틀렸든지 중요치 않았다고 봅니다.
대중들이 그를 "우리편"으로 인식하는 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 예측보다는 "정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시그널입니다. 정부가 설레발을 하도 쳐대서 자꾸 빗나가니까, 미네르바도 틀린 예측을 내 놨든 어쨌든 "정부가 틀렸"다는 건 "맞았"으니까 피상적 신뢰를 얻기는 쉬웠을 거란 거지요.
이게 (구전)문화 탓이라는 분석도 나왔고 종교라는 분석도 나왔으니 저는 "대중의 자기충족적 예언"이라는 사회심리적 측면으로 3위일체화(...)를 시도해보았습니다.
5. 왜 이런 (전문가집단의 말이 무시되는) 현상이 2000년대 한국에서 자주 발생하는가
전문가집단의 말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경로 - 학술적 출판물 그리고 저널리즘 - 를 통해 전달되어 왔습니다. 전자는 같은 민간의 전문가집단 또는 지배계층의 엘리트관료를 위한 것이고 후자는 대중을 위한 것이지요. 두 가지는 약간의 질적 오차는 있을지라도 결국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서로 '충돌'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미네르바는 전통적인 경로를 따르지 않은 대신 대중에게 좀 더 가까운 네트워크를 이용했지요. 요는 이런 것입니다.
만일 지배계층이 대중에게 가까운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전통적 경로와 동일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런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실현성도 낮다고 봅니다.)
미네르바 이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천지에 널려 있고 대중에게 가까운 네트워크는 오히려 대부분의 지배계층과 "그에 가까운 엘리트"들에게 "멉니다." 루시앨님께서는 정보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지적하셨는데, 말 그대로 이는 "정보들간의 거리"만 가까워졌을 뿐 정보를 다루고 접근하는 기존 사회구조에서 분절된 주체들의 거리까지 좁히지는 못한 것이죠. 사실 인터넷이라는 구조가 논리적으로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나, 정보는 수용주체에 의해 선택적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네트워크가 실제로 "대부분 맞닿아있다고 보기 어려운"상황이 아닌가합니다.
피정책결정집단은 새로운 네트워크를 새로운 의사결정가능성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정책결정집단은 여전히 새로운 네트워크를 전통적 경로에 준하는 방식으로만 사용하려 하는 것이 이 문제의 근원이 아닌가 합니다.
거버넌스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맥락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저는 대안적 힌트를 로버트 A. 달의 "소인구집단(minipopulus)"이나 벤자민 R. 바버의 "전국적 시민포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ㄲㄲ.
1. 말씀하신 부분에 동의합니다 ^^;자신의 계급적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이데올로기를 억제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행해야 한다는 말, 이말을 사실 미네르바는 어기고 있죠.
3.(2)
오오 삼위일체(...) 예. 분명 그런 측면이 크게 존재하는것 같습니다.
5.
음,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네요. 분명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고, 경로가 없는건 아닌데, 사회구조내의 주체들간의 거리는 예전과 같다라...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 내지는 정책결정집단이 정보를 그에 맞추어 사용할 필요가 있겠군요. 아무래도 실제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 자체는 그들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네트워크적 접근법이 제일 괜찮은것 같습니다 :) 룡킴 짱!? (이건 반쯤 헛소리니 무시를;;;ㅠㅠ)
* 책 추천 정말 감사합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
로버트 A. 달이 소인구집단을 언급한 것은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Democracy and Its Critics)" 입니다. 같은 내용을 좀 쉽게 다룬 것이 "민주주의(on democracy, 1999)"인데, 제가 실제로 읽은 것은 이 책뿐이고 여기에는 그 개념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습니다.
벤자민 R. 바버가 전국적 시민포럼을 언급한 것은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A place for us : how to make society civil and democracy strong)"인데 전 너무 어려워서 다 읽고나서도 긴가민가 하는 얘기가 더러 있었습니다.
룡킴 짱은 뭔가요. ㄲㄲㄲ;
룡킴은 네트워크 전공이신 사회학과 김용학 교수님의 애칭입니다 ^^; 요즘 그분 밑에서 플젝을 하고 잇어서 ㅋ
사람들이 왜 미네르바를 그렇게 종교적으로 따랐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소넷님이 제시한 재테크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메세지의 전부는 아니었고, 적어도 중요 논점의 전부는 아니었으며, 보기에 따라서 중요 논점이 아니었습니다.
트랙백하는 제 글에서 제기하는 것은 일종의 대리인 문제입니다. 대리인과 본인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가 상충하는가는 대리인의 진정성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중 하나입니다.
이 시대에 전문가들의 말이 안 먹혀들어가는 이유는, 전문가들의 이익이 '진실'을 말하는 데 있느냐는 의구심이 팽배한 분위기가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전문가들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러니 어딘가 있다는 '우리편'에 종교적으로 끌려들어간 것이죠.
전문가의 말을 일반 대중이 알아들을 수가 있는가에 더해서, 전문가들이 신뢰받고 있는가의 문제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라는 것이죠.
매트릭스에서 깨어나라는 말이 그의 주요 메세지였다는데 동의합니다. 사실 이 글을 보니 새롭게 생각나는 설명할수 있는 요인이 있는것 같습니다. 바로 리치몬드가 기독교의 이단에 대해 연구할때 쓴 방법인데, 기독교안에는 두 분파, 즉 현재를 유지하려는 분파와 새 시대를 개척하려는 분파로 나뉘며, 이 둘간의 텍스트의 구조는 뚜렷하게 차이점을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이 지금 제 옆에 없어서 ㅠㅠ) 이렇게 본다면 확실히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한 이유를 설명할수 있겠네요.
역시 일반 사람들로서는 현재와 같은, 베버의 소명이 폐기되고 그 자리를 각종 인센티브로 인한 주인-대리인 문제를 못견디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미네르바와 같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개인을 찾았다는 점 역시 이 문제를 설명하는 하나의 관점이 될것 같네요. 좋은글 잘 봤습니다 :)
블로그에 썼던 글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구성의 모순을 역으로 생각할 수도 다는 점입니다. 각 개인에게 좋이 것은 전체로 봐서도 좋다는 보장이 없다면, 전체에게 좋은 것이 각 개인에게도 좋다는 보장 또한 없습니다.
97년 외환 위기는 본질적으로 고성장 기조가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차입 경영을 계속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은, 현대 삼성같은 수준의 기업들도 부채비율이 300%정도는 됐었죠. 그런데 지금은 부채비율이 100% 내외인 기업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반면에 세계적으로 저축율이 높았던 대한민국의 가계는 지금 미국 수준의 낮은 가계 저축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리해고 도입 당시 DJ 정권의 메세지는 '정리해고로 기업을 살리고 나면 다시 사람들을 일자리로 불러들일 수 있다. 지금 정리해고 하지 않으면 모두 죽지만 정리해고로 모두가 살아날 수도 있다.' 였습니다. 정말로 일터로 불러들렸나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불러들인 사람들도 비정규직이 많았죠.
위의 현실의 인과 관계를 해석하는 것은 다른 긴 글로 해야 할 일이고, 이 상황에서 '전체에 도움이 되면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은 매우 소수로 줄었다고 봅니다. 이건 제 주변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니 어떤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겠네요.
이런 정황에서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결국 미네르바는 우리편은 아니었다.'라는 말은, 성립 가능한 논리 중 하나지만 유일한 논리는 아니며, 그 논리로는 저들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이른바 기득권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견을,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의 관점에서 전체의 이익이라고 믿는 바를 '전문가적 견해'라는 이름 하게 발표할 수 있는 한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에 원글에서 지적한 대리인의 문제가 남습니다. 작년 6월~7월까지도 정권은 6% 경제성장이 가능하다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자, 어느새 재정정책보다는 감세가 경기부양 효과가 높은 것으로 말이 바뀌어 있습니다. 최근 김이태 연구원의 처분을 보고, '연구원의 이익이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바 대로 발표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제 관점에서 굉장히 놀라운 사람일 것입니다.
sonnet님의 경우는 대중이란 면을 넓게 해석한 부분이 있는데, 그동안 그분의 글을 본다면 보수주의자로서 현재까지 이룬 진보의 가치를 유지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특정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문가는 있어왔고, 그 의미를 부르주아 계층의 전문가로만 한정시키는 것은 자칫하면 사태를 그릇하게 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미네르바 같은 이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해를 끼치고, 마치 강남 부동산 소유자를 대변하는 전문가와 별 차이가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해서 미네르바가 특정 계층의 전문가임을 부정할수도 없는거죠.
물론 sonnet님의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그말이 맞지만 사실 대중의 입장에서는 단기적 이익이라도, 내가 딴다는데! 라는 마인드로 충분히 지지가 가능한 것으로 보이구요. 또 전문가를 찾는건 일정부분은 나대신 생각해 줄 사람을 찾는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꼭 정당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점에서 인용한 2071님의 포스트 후반부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즉, 정리하면, 사회전체적으로는 분명 미네르바 같은 이들이 해를 끼치는 조언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네르바가 특정계층(비록 기만적일지라도)의 전문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될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충분히 향후에도 미네르바와 같은 서민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고 보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강남 부동산 소유자 대표들의 전문가처럼 공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칠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적하신대로, 이는 한국에서 진정한 계층간의 분화를 나타내는 하나의 신호일 수 있을것 같습니다. (가장 무서운 시나리오네요... 물론 계급적 정치성향은 필요하지만, 서로간의 정책을 '성과에 따라 평가'해서 정책 결정을 하는것이 아닌, '이념에 따라' 평가해서 정책결정을 내리게 되면 정말 문제는 심각해 집니다. 이미 그런 부분들 - NSC를 없앴다가 요즘 부랴부랴 비상경제회의를 만든 것이라던지 - 이 점점 보이기에, 정책적으로 점점 더 서로의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현 상황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sonnet님의 중요 문제의식"으로 언급하면서 링크 거신 글이나, 이전에 몇 번 지나가면서 본 sonnet님에 대한 제 생각은, 정치제도에 대한 그분의 신념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가 아닌 테크노크라시에 있다는 것입니다.
링크하신 글 전반부의 논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와 중우정치이다.
2. 삼권 분립은 독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3. 대의제는 중우정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한 제 의견은, 2번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1, 3번에 대해서는 아닙니다. 그런데, 1번에 동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2번의 결과는 사뭇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지배층의 수를 기준으로 셋으로 나누고, 이것이 정상 작동할 때와 각각의 특유한 우(憂)에 빠진 경우를 나누어, 전자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 불렀고 후자를 독재정, 과두정, 중우정이라고 칭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민주주의가 빠질 수 있는 위험에는 독재정과 중우정뿐만이 아니라 소수에 의한 과두정도 포함되어야 하며, 개인적으로는 이미 상당 수준의 민주화를 이룬 국가가 가장 조심해야 할 적은 독재정이 아닌 특권계층에 의한 과두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sonnet님의 구분에는 이에 대한 특별한 경각심은 보이지 않으며 과두정과 민주정의 구분은 모호합니다.
2.번의 결과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달라집니다. 삼권분립은 독재 체재를 막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으며, 저 역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과두정의 출현을 저지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3권 분립은 불충분합니다. 이를테면 공화정 로마는 원로원과 집정관으로 견제 장치를 만들었으나 우리는 공화정 로마를 말할 뿐 민주정 로마를 말하지 않습니다. 미국인들 역시 Democrat이 상대방을 Republican이라고 부를 때는 비민주적이라는 의미가 담기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과두정과 민주정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입장이라면, 링크된 글처럼 '자, 이제 삼권분립으로 독재는 막았으니까 다른 걸 해보자.'라는 자세가 나올 수 있습니다.
3.번은 제가 볼 때는 설득력이 부족한 소수설이며, 매우 위험한 결론으로 치닫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3번의 의견을 뒷받침할만한 것은,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모르겠지만 사회계약설이 가장 가까울 것 같습니다. 자신보다 전문적으로 국정을 돌볼 수 있는 사람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형태가 되겠지요.
그러나 사회계약설에 대해서 조심해야 할 점은, 사람은 태어나고 보니 한 나라의 국민인 것이고, 실제로 사람들이 모여서 '이 사람들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이 전체에 이득이 되겠다'든지, '더 잘 살기 위해 국가를 만들어야겠다'든지 하는 식으로 태어난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계약론은 권력 탄생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정당성 근거로 작용하는 것이며, 이 점은 바로 루소 자신이 사회 계약론에서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의 관점을 지지하는 시나리오는 말하자면 bottom-up입니다. 작은 단위의 사람들이 비교적 공동의 의견으로 조직을 꾸려나갑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큰 조직을 만들면서 상부조직에 권한을 넘깁니다. 이 과정에서 점점 더 큰 조직이 만들어지며 필연적으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대중은 전문적 엘리트에게 권한을 맡기게 되며 엘리트들은 중우정치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자나 역사기록을 따르면 국가의 탄생 원리는 사회계약설보다는 국가정복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관료제의 탄생 역시 중국의 경우 막스 베버의 고찰을 따르면 황제와 지배계층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며, 서양의 경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식 관점에서 본다면 국왕의 사유(私有)조직이 시대를 거치면서 공공에게 지배권이 넘어간 것입니다.
제가 보는 한 권력 소유의 역사는 top-down방식으로 흘러왔습니다. 관료제를 비롯한 통치 조직은 저런 사회 계약을 통해서 성립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이전에 이미 통치자를 위해 존재했던 것을, 지난 300년간 끝없는 투쟁을 통해 보통 국민이 쟁취한 것입니다. 차티스트 운동부터 여성 투표권을 위한 투쟁들에 덧붙여 미국에서 정말로 흑인에게 동등한 투표권이 부여되는 것은 1965이나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대통령 직선제를 정착시킨 것은 불과 20년밖에는 되지 않죠.
시간축을 300년 정도로 놓고 볼 때, 전체적인 권력 이동의 방향성은 엘리트에 대한 권력 이양의 방향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통치 조직을 지배하는 데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의 범주를 계속해서 늘려가는 방향으로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직접민주주의에 기술적인 요인이 문제가 아니라는 sonnet님의 주장은 상당한 어폐가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여정이 1776부터라고 할 때, 어떤 나라에서는 기술적 한계때문에 대통령 선거인단같은 요상한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이 있었으며, 전자투표 가능성이 열린 시점은 불과 10여년 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과 더불어서, IT 시대를 목전에 둔 시점의 온갖 설레발들과도 - 엘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통신기술 발달에 의한 민주주의 제도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습니다. -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언급하신 글에서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정치에는 링컨이 1863년 게티스버그에서 약속한 세 가지 중 for the people만이 있을 뿐, 나머지 두 가지 -특히 by the people-를 보장하기에는 매우 미약하며, 근대적 민주주의의 의의는 이해관계의 합치에 있다고 믿는 저로서는 by the people 없는 for the people의 성립 가능성은 긍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서 제가 sonnet님에게 내리는 평가는, 그분이 근본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테크노크라시이지 데모크라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테크노크라시의 신봉자이기 때문에 테크노크라시와 매우 친화적인 과두정에 대한 경각심은 약할 수밖에 없으며, 전체적으로 갈등론보다는 기능론에 쏠리는 경향을 가지게 되며, 미네르바라는 인물을 평가할 때 'for the people'의 관점을 중시하나 -대중자신을 해치는 의견을 냈다는 것 - 'by the people'의 관점은 -그가 대중을 깨우려 했다는 것-간과하게 되기 쉬웠으리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 두 가지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그분이 최선으로 여길 것으로 보이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발된 테크노크랏의 정치」는 저 역시 현실적으로 최선의 답이라고 여기고 있고, 그 목표를 위해서는 저는 sonnet님을 '우리편'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넓은 식견을 존경하기 때문에 가끔 제 뜻과 거슬러도 그 블로그에 들르게 되는 것이죠. :-)
루시엘님은 저에 비해서 사회학적인 소양이 훨씬 깊으신 분으로 보이고 '정치적 사건과 정황'보다는 그 뒤에 숨은 이론적 시각을 찾고 계신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며, 찰즈 라이트 밀즈를 사회학 분야의 우상으로 삼은지라 파슨스식의 사회학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살짝 반감을 가질 것 "같은"(왜냐면 반감을 가질만큼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죠 ^^;;;) 저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다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루시엘님과의 몇일간의 대화는 즐거웠습니다.
sonnet 님의 입장에 대한 분석은 새롭군요. 저는 그저 약간의 의심만 가져왔을 뿐인데 정연한 논리구조를 보게 되니 꽤 타당한 것 같습니다. 아마 그분은 키워를 어느정도 즐기시는(?) 만큼 추후 이 부분이 해명될 여지가 있으리라 보입니다. 진심으로 잘 보았습니다. 역시 밀즈를 좋아하시는 분 답다(... 저도 사실 밀즈는 사회학적 상상력 말고는 본적이 없어서 이런말을 해도 될런진 모르겠습니다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특히 대의제와 관련해서는 로버트 달의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에서의 비판이 sonnet님의 글에도 적용될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사회계약설에 대한 비판은 저 역시 동의하고, 그 점에서 현대 자유주의 논자들이 서있는 발판은 꽤 위험한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른바 무페와 같이(무페도 두세권밖에 안읽어서 이런말 하는게 그렇지만;) 자유주의 이외의 진영에서 급진적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현대의 잘 조율된 "인권" 개념을 수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보입니다.
저는 사회학 지식이 없습니다(...) 물론 사회학과 교수님 밑에서 플젝을 같이 하긴 합니다만 대충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플젝에서 학부생이 하는 역할이 얼마나 미미한지(...ㅠ) 그저 많이 배우려 합니다. 제 글에서 파슨스를 느낀다는건 (제가 주워들은바가 맞다면) 놀랄일은 아닌것 같습니다만, 저도 파슨스를 잘 모르므로(...) 그저 현재 상황을 설명할만한 어떤 정합적인 틀들이나 방법론을 모아보면 어떨까? 정도로 느슨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개인사정이라니 어쩔수 없으시겠지만, 정말 아쉽군요ㅠ 혹여라도 후에 그 일이 끝나고 시간이 되신다면 다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저도 정말 몇일간 즐거웠습니다 :) 링크 추가할께요 ^^;
역학으로 본 우리 경제의 나아갈 방향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 본 2009년 국운
역학으로 본 노무현 전대통령과 봉하대군 노건평
역학으로 본 미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와 한국
역학으로 본 탈렌트 노현희와 아나운서 신동진의 궁합 실례
http://cafe.naver.com/fortunedrkss1102
이딴 광고글 즐입니다요
노무현 정부보다 이명박 정부의 타격이 큰것은 노무현정부의 과학 정책은 정부의 큰 중점 정책이 아니여서 황우석이 노무현정부 자체에 치명타를 입힌것이 아니지만 이명박 정부는 경제 성장을 이유로 당선되었고 그것을 흔든건 미네르바인데다 결과가 어떻든 촛불시위로 민심이나 권위가 악화되었으니 타격이 큰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사건 자체는 황우석 때보다 반발이 더욱 극심하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건 황우석의 조작 판정 같은 '반전'이 불가능한듯 싶어요. 정부가 미네르바 체포의 근거가 된 사건을 실제로 권고했다고 밝혀진데다가 친정부언론들이 미네르바 학벌로 치졸하게 공격한 부분이 강해서 참...(-_-) 정부가 문제가 뭔지 좀 알아야 할 마당에 감을 못잡으니... 걱정됩니다.
어쨌든 좋은글 감사합니다. 생각해 볼수 있었습니다.
루시앨 박사의 박학다식함과 문장의 현란함은 경탄할 지경이외다.
차라리 내가 약간이나마 아는 경제학이랑 철학으로 한정시킬껄 그랬어.
아 ㅁㄹ어마ㅣㅁ함ㄴ;ㅣㅎㅁ닐ㄴㄹ 책읽어야되는데
1.의 경우 ^-^;
2.의 경우, 우리는 어떤 사람이 간단한 덧셈 연산을 할줄 알게 된뒤, 그가 페아노 공리계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그의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