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일기 및 근황

1.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Napoleon

영문판과 한글판이 동시에 있었고, 영어판을 집으려다가 그냥 한글판을 집었다. 그리고 그걸 짚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각종 신화에서 차용한 은유와 인용으로 가득차있어서, 영어로 읽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글은, 처음 접하기는 월러스틴의 글 안에서 인용문으로 접했던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역사책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직접 읽은 지금, 이 글은 본격 정치비평이랄까.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게 아니라 정치비평서를 읽은 느낌. 마치 강준만 씨나 박권일 씨의 글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순서를 따지면 저자가 저 둘에게 영향을 주었겠지만-_-; 내가 접한순서는 반대니까.)

어떻게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나폴레옹 3세에게 던져주었나? 이것이 핵심 문제의식이다. 설명은 많이 조잡하다. 질서파와 산악파, 산악파의 퇴장, 질서파의 갈팡질팡, 결단없음은 보나파르트에게 하나, 둘씩 권력을 넘겨주게 된다.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프랑스의 생산구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잘 설명한다.

그러나 사무엘슨 말대로, 이런 난잡하고 두서없으며 현란한 설명은 곧 천재만이 쓸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저자의 다른 책(수고)를 읽을때는 그런 생각이 안들었으나, 이 글을 읽고 저자은 천재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보편계급이 왜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게 되는지를 이 글은 잘 보여준다.

현재에는 저자의 이런 분석틀(계급, 생산구조를 통한 분석)이 일반화되서 쓰이는듯 하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는 이 글은 한 특수한 예라 볼수 있을 것이고, 저자가 의도한 보편적 발전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내게 읽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언제나 가질수밖에 없는 "정치적인 것", 즉 균열과 갈등을 쫓아내려 시도할때, 그것은 곧 민주주의 그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름 아닌, 계급간의, 더 나아가서, 정체성간의 균열과 모순을 독점하는 체제이다. 브뤼메르 18일은 쫓겨난 (정체성간) 갈등과 균열이 그 쫓겨난 계급을 대표하는 1인에게 넘어갔을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수 있다. 의회는 그저 보나파르트가 의회 밖에서 벌이는 일을 추인할 수 밖에 없던 것이고. 이는 거리의 정치가 활개치는 모처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는것 같다.

한번 더 읽어봐야 할 글. 짧으니까 반납 전에 한번 더 읽고 주어야겠다. 덧붙여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영어로 읽어야겠다 ㅠ_ㅠ

2. 무례한 복음

드디어 이택광의 신간을 읽었다. 몇몇은 이미 블로그에서 보던 글이기도 하나, 몇몇은 완전 새로워서 즐겁게 읽었다. 사실 부끄럽게도(...) 요즘 집에서는 컴퓨터나 TV를 보느라 책을 안읽는 편인데, 이 책은 너무 재미있어서 오랜만에 집에서 다 읽었다.

책 자체는 여러 문화 현상들에 대해서 옴니버스 식으로 되어있지만, 자세히 읽다보면 몇가지 큰 줄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중간계급이라는 실체이고, 또 하나는 욕망의 정치이다. 저 두가지는 사실 그 정의의 모호성이 좀 문제이긴 하나, 이택광의 논지는 너무도 적절히 상황 설명에 들어맞는다.  특히 이렇게 바라볼때 단순한 선악의 구도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내가 읽어낸 문제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어떻게 이것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이다. 이를테면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의 양식이 특수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채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바꾸는데 있어서 어떤 "과학"과 같은 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걸까? 물화(Reification)같은 단어는 이런 것을 설명하기엔 적절하나, 단지 적절할 뿐, 이는 뼈와 살이 타는 스토리가 아니다. 즉, 우리 삶의 행동을 바꾸기엔 부적절하다. 즉, 자신의 삶의 양식이 보편적이 아니라는것, 그것은 매우 특수한 것이며, 다른 양식이 가능하다는것, 그리고 타인의 삶의 양식과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되는것인지, 이런 것들을 고민할 수 있게 하는 장치는 어떤 것일까?

이를테면 저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해보자. 처음 그의 글을 읽었을때, 내게는 그의 글이 여타 다른 분야의 것들로 검증가능한 명제들과 검증불가능하나, 논리의 연결을 위해서 그가 추론한 명제들로 나뉘어 읽혔다. 즉, 나는 그의 글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필요했다. 즉, 그의 글은 몇몇은 (통계적으로) 검증가능했지만, 몇몇은 애초에 정의상(논리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시간이나 비용 등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나뉘어 읽혔고, 후자는 나 자신을 불편하게 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는 반응은 당연히 따라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글은 검증 가능한 명제들과 불가능한 명제들이 모여서 하나의 "서사", 즉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내게 그 거대한 스토리 속에서 나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미로를 찾고, 출구를 찾으려는 유혹을 조금씩 던져준다. 이런 경우 명제의 검증가능성은 더이상 문제가 아니며, 오직 새로운 "서사"를 구성하기 위한 "행동"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문단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수 있을까?

한때는 그 해답이 이야기 그 자체라 생각했다. 퓨처워커에서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생각하는 장면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시인이 한 여린 마음을 가진 인물에게 자신을 "호명"해 달라고 부탁한 장면이다. 시인의 그 부탁에 대해서 그 인물은 갈등한다. 마치 안기고 싶다고, 하나가 되어달라는 부탁으로 느껴서. 결국, 그녀는 다른이를 생각하며 기다리는 즐거움 속에 사는 한 인물에 의해 "순간적으로", "어쩔수 없이" 시작하게 되고, 곧 그 호명은 그녀의 즐거움으로, 쾌락으로, 삶의 내던짐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야기가 삶을 바꿀 것이라 믿지 않는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바뀌기에, 우리의 삶은 이야기에 집중할 시간이 없다. 또한 이야기만을 듣고 삶의 태도를 바꾸기에, 내 삶은 너무 양식화되어있다. 그렇지 않은가?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고, 커피는 스타벅스를 먹어야 하며, 돈을 벌면 친구들을 만나 쏴야 하고, 데이트를 하면 카페를 가야하는 이 양식화된 생활. 양식화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마저도, 수많은 해변의 사람들, 계곡의 사람들로 인해 여전히 벗어날수 없는 그 몸부림. 저항하기엔 이미 선택지는 정해져있는 것들이 많다.

따라서 바꾸어야 할 것은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물질과 물화된 것들 그 자체이다. 일반적으로 거리의 정치를 요청하는 이들이나, 삶을 바꿀것을 요구하는 이들은 毛主義에 가까운것 같다. 그러나 바꾸어야 할것은 모씨도 지적했듯 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구성하는 물질과 물화된 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예전 모씨의 분석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물질과 물화된 것들의 운동을 새롭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 1번글의 대상인 책의 저자가 지금 살아있다면 또 다시 케임브리지의 도서관/컴퓨터에서 구글링을 하면서 경제학 책과 논문을 읽었을 것이고, 자신의 언어로서 수학과 영어를 동시에 택했을 것이며, 합리 선택 뿐 아니라 다양한 주체의 의사결정방식(현재 논의되는 행동경제학 등의 심리학을 비롯해서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이 공존할 수 있는 Stochastic 모델링을 완성한 뒤에, 마셜을 따라서 같이 그 모델을 말로 풀어씀과 동시에 개인의 운동과 사회의 운동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력을 가지는 글을 쓰려 노력했을것이라 본다.

두번째 문제는 보편계급의 부재이다. 이를 아버지의 부재로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많은 준거점이 자신이 아닌 미국으로 표현되는 어떤 선진세계에 대한 욕망에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드라마에서 한국 상류층의 아침 식사를 영국 노동계급의 아침식사와 흡사하게 꾸며놓은 점 등은 그런 좋은 실례이다. 특히 강마에가 해방적 부르주아를 재현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있게 읽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신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그것이 과연 그런가는 자신이 가진 미의 기준을 보면 알수 있다. 과연 당신은 어떤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즉, 무엇이 당신에게 추하게 보이고, 무엇이 예쁘게 보이는가? 그것이 온전히 당신의 취향인가? 그런의미에서 이 책은 꽤 많은 한국 사회의 성원들이 가진 미학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때때로 읽으면서 놀랄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보편계급의 부재는 곧 새로운 미학을 써야할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보편 계급은 많은 부분에서 세계화를 가장한 미국화로 이동될 수 밖에 없으며, 미국화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사회를 미학의 기준으로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의 자생성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자생성이란 이유는 나 자신에게도 와닿지 않는다. 오히려 내 생각에는 나 자신의 미학의 일관성을 가져오기 위해서 요청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바라볼, 더이상 다른 사회의 기준을 그대로 자신의 미학으로 수용하지 않을 하나의 사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타자의 신경에 대해 신경을 끌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다른 이의 신경을 염두에 두지 않은채 사는 것은 왕따가 될 뿐이다. 이부분은 공부가 짧아서 뭐라 더 말하기 힘들다. 질문만을 남겨두면 이렇다. 어떻게 자신의 미적 기준과 사회의 미적 기준이 조화/갈등/충돌 등의 관계를 맺을 것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설정되야 하는가?

아무튼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3. 다이어트

ㅊㅎ형과 ㅂㅎ의 변화를 보고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ㅂㅎ이 말에 의하면 3~4시간을 걷고, 1시간을 웨이트를 하면 뱃살이 2주만에 빠진덴다. 나도 해야지 ㅠ_ㅠ 웨이트를 끊기에 현재 헬스를 정기적으로 다닐만한 스케쥴이 안나오니, 일단 걷기라도 시작해야 겠다. 농담아니고 앞으로 추가 일정이 없는 한 학교에서 ㅂㅊ까지 걸어가볼 생각이다. 문제는 추가 일정이 항상 생긴다는건데...ㅠ_ㅠ

4. 아이디어-양자역학과 선호함수

뭐 이미 누군가 생각했을것 같긴 한데... 양자역학에서는 상태란 측정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즉,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함에 의해서 어떤 상태가 나오는 것이다.이런 논의는 선호함수의 논의에서도 써먹을수 있을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현시 선호를 잘 다듬으면, 결국 선호란 실제 "상품을 살때" 측정되는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서면 인간의 선호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좀더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언제나 그렇듯, 물리학자들이 이미 수학적으로 다 풀어놨을거 아니야? ㅋㅋ

뭐 누군가 이미 아이디어를 냈을테니;;; 혹 경제학과 분들이 이게 정말 새로운 아이디어고 이걸 논문에 쓰려 하신다면 쓰세용. 다만 Acknowledge에 제이름을 좀...ㅠ_ㅠ "루시앨이 아니면 이 논문을 쓸수 없었다" 이런것좀 굽신굽신 ㅠ_ㅠ

by 루시앨 | 2009/08/16 23:02 | 잡담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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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이택광 at 2009/09/01 14:25
좋은 평 감사합니다. 루시앨님처럼 제 주변에 눈 밝은 독자들이 많아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Commented by 루시앨 at 2009/09/01 15:07
제대로 읽어낸 건지 의심스러웠는데, 다행이군요. 2쇄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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