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마지막주 주기

마지막주 일기라는 형용 모순은, 사실 마지막 주 주기라고 쓰고 싶었으나 그러면 다른 뜻으로 이해될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쓰게 되었다.

 

1. 복습의 유용성

 

적분이 너무 잘풀려(...) 뭐 이런것도 있지만, 확률론 5단원을 위해서 열심히 종순님과 복습하던 찰나에 느낀건, 역시 예습보단 복습이 낫다는 것. 그것이 설령 C+을 맞은 과목일지라도 말이다. 암튼 이번 학기는 발리지 말아야지.

 

2. 책일기1-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권

 

문혁은 역시나 잔혹했다. 저자는 문혁이 가져온 파괴에 대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의 그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도대체 그의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자신의 권력 유지에 있었다고 하기엔 그 거대한 시도와 문혁 초기 마오의 입장은 모순되는것 같고, 그렇다고 중국 인민의 구원에 있었다기엔 마오의 입장은 너무 세속적이다. 암튼 단순히 임표와 모주석 간의 다툼으로 보기엔 힘든 점이 있다.

 

이과정에서 주은래와 등소평이 부상하는데, 주은래의 역할은 사실 책에서 매우 과소평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것은 87년 이후 노태우-김영삼의 과소평가 등을 생각해 볼때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는 아니다.

 

등소평의 진압은 잔혹했다. 베이징 전역을 탱크로 포위하고, 천안문을 점령한 그의 진압. 그로 인한 숨겨진 갈등은 결국 신 프롤레타리아와 관료계층의 균열로 표출되리라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사회주의적 관념을 놓지 않는 저자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할 뿐이나,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는 타자의 자기화를 통해 유지되어 왔던 것을 잊어선 안된다. 등소평이 도입한 것은 사실상의 자본주의이고, 그의 노선은 급격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단순히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나오는 마냥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자유주의를 이끌수 있다로 보는것은 그리 좋은 시각은 아닌것 같다. 오히려 경찰 행위 등이 가지는 그 폭력적 성격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항상 존재해왔던 것인 만큼, 정치적 자유주의는 결국 그 지지 기반이 되어줄 계층/계급의 균열이 아닌 한 획득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법치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이득을 보장해주는 현재의 시스템이다. (나는 지금 명백히 포린 폴리시의 아쉥 후앙의 논지를 비판하고 있다.) 현행 제도 하에선 새로운 부르주아지-관료제의 유착은 더 공고화될 수밖에 없고, 이는 중국의 민주화를 점진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너무 점진적이어서 진행이 안될수도 있지만.

 

3. 책일기2 - How to read 데리다/라캉

 

사실 하우투리드 시리즈는 예전에 다 읽긴 했었는데, 최근 데리다와 라캉을 다시 읽었다. 하우투 리드 데리다는 정말 잘 만든듯 하다. 하우투리드 라캉의 경우는 판단 보류.

 

데리다의 경우 그의 개념들, 특히 수행적 발화와 관련한 내용들과 해체, 차연 등의 개념을 매우 쉽게 해석해 놓았다. 데리다는 우리가 흔히 실현되어 간다고, 혹은 실재했었다고, 혹은 존재한다고 믿는 각종 이상들이, 사실은 우리의 판타지임을 매혹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그에게서 각종 이상은 우리에게 실현 불가능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우린 '불가능의 가능성'이라고 몇몇 데리다 역자가 번역어로 쓰는 이상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내 지난 글에서도 설명한 적이 있는바, 우린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던, 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상태에 대한 관념만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은 "타협"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과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관념과 우리의 제도의 타협을 통해서 우린 끊임없이 최선을, 비록 최선이라고 결정짓는 순간 이미 타락하고 추악해져 버리는 그 최선을, 추구해 나아가야 한다.

 

이를 내 지난글에서 설명했다는 것은, 내가 말하던 "우리의 선택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무지 때문이다"라는 것과 일부는 같고 일부는 같지 않다. 내 생각에 데리다는 우리가 가진 이상적인 것에 대한 관념이 애초에 판타지라는 점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다. 또한 그런 판타지가 현실에서 "모순"으로 나타난다는 점 역시 잘 지적하고 있다. (특히 애도에 관한 그의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데리다는 어느정도 현대 철학의 입지점을 잘 드러내주는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가지 점이 더 흥미로웠다. 첫째는 과학과 데리다의 연관성. 과학이란 결국 인식론적으로 체험 불가능한 실재(물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던지는 타협이라 할수 있다. 그렇기에 그 이론은 수만가지가 있을수 있고(스콜렘-뢰벤하임 정리) 데이터(측정량) 역시 언제든 바뀔수 있지만, 아니, 바뀔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우리가 세계를 사후적으로 이해할수도 있게 해주는 툴이 된다. 즉, 과학을 새롭게 정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런 것들은 이미 해놓은 사람이 있더라 ㅠ_ㅠ) 수학도 마찬가지로, 차이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여러 언어들 사이를 규정하려는 근본적인 시도라 볼수 있고, 우리는 단지 곱셈과 나눗셈만을 추가하는 공리계에서 괴델의 정리라는 유령을 맛볼수 있는 것이다. ( +.-의 연산만 존재하는 공리계에서는 괴델의 정리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둘째는, 그러나 이런것들은 정말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데리다의 희망이다. 위에서 말한 모순이나 과학 등이 과연 정말 우리의 이해라는 보장이 있는가? 데리다는 이에 대해서 모호하게 말한다. 우리도 모르는 그 순간에, 이미 실현되어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사실 이부분은 하우투리드에 어째서 이런 신비주의적인 결론으로 데리다가 끌고가는지를 잘 설명해 놓지 않아서 불만이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부분은 기독교의 "인자가 오는때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이나, 그의 Optimistic한 전망을 잘 드러내 준것 같다. 어째서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했을까. 과연 우린, 우리도 모르게 이미 도래한 그러한 구원을 느끼고 있을까.

 

그에 비하면 하우투라캉은 지젝의 재기넘치는 글을 본것 같아서 즐거웠다. 다만 임상 결과에 대해 소개도 안하면서 서문에서는 라캉의학의 임상 어쩌고 하는말은 좀 거슬렸지만.

 

하우투라캉은 아무래도 거슬리는 면이 많았다. 지젝-라캉이 일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온 것들을 새롭게 건드리는 그 지점은 분명히 공이라 볼수 있으나, 도대체 왜 데이터를 들이대는 건지는 잘 이해를 못하겠다.

 

4. 사법부의 권위에 관하여 - 책일기3(김명호 사건 관련 글)

 

흔히 우리가 정부라고도 부르는, 정부의 세가지 부분중 하나인 행정부는 그 권위를 바로 폭력에서 얻는다. 행정부의 경찰행동은 행정부의 권력을 나타내는 동시에 권위를 나타낸다. 입법부는 어떻게 권위를 나타내는지 생각해 볼때, 입법부의 권위는 바로 우리의 욕망의 대변자라는 대에서 나타나게 된다. 우리 중 누군가는는 그가 원하는 것을 입법부의 이름으로(서명으로) 시행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입법부의 활동은 매우 저속하고 교양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물은 법은 모두를 구속하고, 누군가에게 이익을 주고 누군가에게 손해를 주는 만큼 사실상 막강한 권력을 주게 된다. 이는 우리가 우리 욕망에게 가장 큰 자유를 허락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렇다면 사법부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사법부의 권위는 '이성' 그 자체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사법부는 법의 최종적 해석에 대한 권한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권한은 누구의 것인가? 욕망의 왜곡이 가능한 입법부나, 경찰행위 그 자체가 내재하는 법 자체의 정초적 폭력과는 다르게, 사법부의 권한은 사법부의 수장이나, 헌법이 아니라, "이성"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우린 판결문에 그리 목숨을 걸고, 과연 합리적 판단으로 이 판결문이 도출되었는가를 살펴보게 한다. 물론 사법부도 사실 인식에 있어서는 틀릴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일어나는 오류에 불과하다. 문제는 사법부의 사실 인식은 그로 인한 판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논리적이고" "그 법의 취지를 잘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위의 데리다와 연결 지어서 해석 법학을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이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해석 법학이 다양한 법의 해체적 독해를 통하여 새로운 정의의 타협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으나, 데리다에 따르면 애초에 정의로운 판결은 도래할 것이나,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문단의 말은 일반론적으로 해석하는 편이 맞다.) 그리고 이는 재판 과정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형사소송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재판의 판결이 과연 누구에게 존중받을 수 있을것인가? 설령 행정부가 사법부의 입장을 그 폭력으로서 적극 존중한다고 해도 그것은 행정부의 폭력에 의한 정당화일뿐, 사법부 자신의 권위로 이어지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명호 사건은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왜 판사는 신청한 석명권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거절에는 그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물론 석명권의 행사에 관하여 어떤 류의 예규, 판례 등이 성립되어있는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명권 행사 신청을 거절한다면 판사는 그에 합당한 이유(예규와 판례, 조리에 근거한)를 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명백한 범죄라 하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백주 대낮에 일어난 사건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혹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 "사실이 맞는지" 그리고 그의 형량이 "그의 죄에 합당한지" 따져보아야 한다. 김명호 사건의 속기록은 사법부의 재판 진행이 각종 의혹을 속 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한채 남아있다고 의심할 만 하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다양한 잘못을 저지를 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에 해당하는 조직 활동에 대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결국 조직의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만든다. 하나의 사건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나, "이성적 판단"을 핵심으로 하는 사법부가 그 자신의 이성을 내던진채 판단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역할을 부정한 꼴이 된다. 또한 다종 다양한 권력적 수단을 가졌고, 동시에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갈아치울 수 있는 입법부나 행정부와 달리, 오직 그 판결이 가지는 "정의(Justice)"에만 의존하는 사법부로서는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부정하는데 대한 대가는 매우 크게 돌아올 수 밖에 없다.

 

5. ㅇㅇㅎ 엠티

 

5기 아이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엠티. 방금 전에 갔다와서 사실 ^^; 기타를 이젠 약간 칠줄 안다고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다 (...)ㅋㅋㅋ 즐거운 이야기를 많이 하고 들었던 엠티. 한영형의 열정에 대한 말이 매우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방향은 사실 그쪽일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밤을 샜던 엠티. (약간 자긴하였으나 그건 무효 처리좀;;;;ㅋㅋㅋ) 기억나는 키워드는 클럽에 썼으니, 생각이 나면 펼쳐봐야지 :) 암튼 또봅시다.

by 루시앨 | 2009/08/30 02:14 | 트랙백 | 덧글(7)

트랙백 주소 : http://freecracy.egloos.com/tb/505567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BeN_M at 2009/08/30 09:26
1. 자본주의의 주특기인 '타자의 자기화'...난 그게 자본주의가 '최강의 체제'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같다. 그 흡수성 하나는 정말 최고로 인정할만 하지. 어쩌면 그 흡수성이 지금 세계에 가장 적합할 수도 있는거고.
(많은 먹물들의 판타지 속에 있는 제각기 다른 것들의 공존이 말 그대로 판타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야)


2.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라 - _-

이번에 서거하신 고 김대중 선생님의 일기에 보면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 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라는 말이 있는데...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는 연관이 아예 없진 않지만 확실한 연관관계는 없는 걸지도.


3. 군대오면 머리가 나빠지는 게 맞는 거 같아.
Commented by 루시앨 at 2009/08/30 21:00
1. 물론 저도 자본주의의 타자의 자기화라 쓰긴 합니다만, 문제는 그렇게 정의하면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매우 모호해져서;; ㅠ 고민입니다;ㅋ

2. 예. 아예 없는건 아닌것 같은데 특수한 경우인것 같아요. 지금 인과를 함부로 결정지을순 없겠죠.

3. 아닙니다 ㅠ_ㅠ
Commented by 땡그랑 at 2009/08/30 10:56
흑 나 그래도 두시까지인가 버텼는데 너무 아쉽 ㅠㅠ
Commented by 루시앨 at 2009/08/30 21:01
아니삼 ㅋㅋㅋ 곧 술자리 몇번 더나가시면 적절한 술안마시면서 마신것 처럼보이면서 오래 버티는 스킬을 익히실거임 ㅋ
Commented by imc84 at 2009/08/30 15:23
2. 자본주의(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자유주의(민주주의에 준하는?)를 이끌 수 있다는 시각에 대하여.

괄호는 그냥 제가 몇 자 적으려고 끌어다 붙인 거니까 아니면 걍 아니라고(...)하시면 됩니다 orz

미국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라고 배웠음;) 로버트 A. 달 선생의 "On Democracy"("민주주의", 동명사, 2006) 후반부에 나오는 설명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아서.

"...민주주의는 시장자본주의 경제를 지닌 국가들에서만 존재해 왔지만, 시장자본주의는 비민주적 국가에서도 존재해 왔다. 이 가운데 일부 국가들 ― 특히 대만과 한국 ― 에서 경제성장과 시장경제가 차례로 동반되어 나타나는 요소들은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민주화를 일으키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이들 두 나라에서 성공적인 시장경제, 수출산업, 경제성장, 그리고 교육받은 광범위한 중산층 등의 발전을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을 전개한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한 채, 동시에 자기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불씨를 심어 온 것이다. 따라서 시장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에 우호적이며 ― 장기적으로는 훨씬 덜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 실제로 비민주적 통치에는 철저히 비우호적이다." (222p, 13장 "왜 시장자본주의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인가" 중)

이 지점에서 달 선생이 언급하는 민주주의는 최소한 두 가지 층위를 갖는 듯합니다. 하나는 '시장자본주의가 우호적일 수 있는' 민주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그보다 '장기적으로 훨씬 덜 우호적일 수 있는' 민주주의죠. 책의 전체 논지는 축약하기 어렵지만, 시장자본주의는 적어도 "명백히 비민주적인"사회에서는 민주주의(전자)에 우호적이고, 그 성격은 민주화의 결정요인이라기 보단 인프라 정도로 봐야겠죠.

법치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충분한 이득을 보장해주는 현재의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더 분권화하지 않고도 계속해서 충분한 이득을 보장해줄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지와 관료제의 "유착이 더 공고화"될 수밖에 없다는 건 "시장자본주의가 더 분권화"하리라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저도 책을 좀 읽어야 할텐데 orz 오늘 토익을 보고 왔습니다 ㅠ
Commented by 루시앨 at 2009/08/30 21:04
imc84님은 졸업을 하셨으니;; 전 아직 학부생인데 사실 책이라도 안읽으면 방학때 정말 NEET이지 말입니다(...)

인용하신 달 선생님의 글은 잘 보았습니다. 다만 중국의 경우 사실상 기업가 = 관료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네요.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의 저자가 걱정하는 점도 그부분입니다. 중국의 각종 유한공사의 기업가들은 사실상 관료의 지위를 겸하는 경우가 많아서, 과연 그들이 정치 개혁의 선구자가 될지 회의적이라고 말이죠. 오히려 점점 증가하는 무산자들로 인한 중국 사회의 균열 표출을 더 높게 보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imc84 at 2009/08/30 21:08
아 그렇군요. 그건 마치 선대 왕조들의 말기에 있었던 부패+축재관리 & 민란 드립이 떠오르네요(사회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게 아니라;) 중국은 그런 상황이군요. 달 선생(...아 과히 친근한 느낌;)이 일반화한 것이 현재 중국 상황을 포괄하고 있는지는 저도 자신이 없으니 여기서 가만 있어야겠습니다 ^^;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